저소득층에서 범죄·학대피해자까지...LH 매입임대주택의 진화

입력
2022.11.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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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요 맞춤형 임대주택 통해 지자체 요구 적극 수용학대피해아동·여성 등에 긴급 주거 지원도

16일 경기 의왕시 내손동 3층짜리 단독주택 2층에 마련된 범죄피해 임시 보호지원시설인 ‘세이프 하우스’. 방 2개에 부엌, 화장실을 갖춘 10평대 집은 4인 가족이 머무르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벽지도 새로 단장하고 기본적인 가재도구까지 준비돼 있어, 즉시 입주가 가능한 상태였다. 지난달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경기 의왕시, 의왕경찰서와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스토킹, 아동학대, 성폭력 등 범죄 피해자가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보호시설로 제공한 곳이다.

LH의 매입임대주택이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저소득 취약계층에서 청년예술과 창업, 고령자복지, 장애인자립지원에 범죄∙학대 피해자 긴급 주거지원까지 확대됐다.

LH 관계자는 “기존 범죄 피해자용 임시숙소는 모텔이나 여성긴급피난처 등이었는데 모텔은 자녀들과 이용하기 부적절하고, 여성긴급피난처는 외출 및 휴대폰 등 이용이 금지돼 꺼리는 상황이었다"면서 "이번에 준비한 세이프하우스는 그런 단점을 해결하고 일상 복귀도 지원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부터 취약층 대상 매입임대주택 사업 시작

LH에 따르면 매입임대주택은 도심 주거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공공임대주택을 신속하게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4년 도입됐다. 시중 주택을 매입하거나 민간 주택사업자가 신축하는 주택을 매입해 공급한다. 건축에만 통상 2, 3년 걸리는 임대아파트에 비해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주거취약계층을 위주로 공급되던 매입임대주택은 2017년부터 청년, 신혼부부, 고령자, 다자녀 등으로 대상이 확대됐다. 최근에는 예술가와 청년창업가, 고령자, 장애인 등으로 대상을 더욱 넓혀 다양한 수요에 대응해 나가고 있다.

매입임대주택은 고소득 계층을 제외한 중위권 소득계층으로 입주자격이 완화됐다. 공공전세는 소득과 자산요건을 따지지 않고 무주택세대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LH는 지난달 말 기준으로 전국에 1만7,000여 가구의 매입임대주택을 공급했다. 이 중 경기본부는 매입임대주택 3,800가구와 지역수요맞춤형 매입임대주택 66가구를 공급했다.


지역수요 맞춤형으로도 운영

매입임대는 지역의 특수한 수요에 맞춰 지자체 또는 비영리단체 등에 공급하는 지역수요 맞춤형으로도 운영된다. 지자체가 관내 주민들의 임대수요를 발굴해 LH에 제공을 요청하면 LH가 적정 주택을 선별하거나 리모델링해 공급하는 방식이다. 지자체 또는 주거복지 관련 비영리기관에 LH가 주택을 공급하면, 기관이 입주자를 모집하고 임대 운영 및 돌봄서비스를 시행한다.

지역수요맞춤형 매입임대주택은 시세의 30%만 부담하면 최장 10년을 거주할 수 있다. 청년, 신혼부부 임대주택의 임대조건이 각각 시세의 40~50%, 60~80% 수준이라는 걸 감안하면 파격이다.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등을 활용하기 때문에 임대료 부담이 낮아 가능한 조건이다. 국가난 지자체, 공공기관 등이 주거 위기가구의 긴급 주거지원을 요청하면 무상 제공도 이뤄진다.

LH는 지난 4월 경기남부 15개 지자체와 경기도를 대상으로 지역수요 맞춤형 매입임대주택의 수요를 조사한 결과 주거 취약계층뿐만 아니라 시설 퇴거자, 학대피해아동∙여성 등 다양했다. 이중 8개 지자체가 도움을 요청해 66가구의 매입임대주택을 공급했다. LH 관계자는 “수요조사 결과 일반 주거지원에서 탈피해 누군가로부터 분리보호가 필요한 긴급 상황까지 도울 필요성이 있어 이번 임대주택 지원 확대에 나섰다”면서 “내년 초 수요조사를 실시해 필요한 매입임대주택 물량을 파악하고 적정선에서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폭력 임시숙소도 제공

지난 9월 의왕경찰서는 LH에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임시숙소를 지원해 달라고 긴급 요청했다. 남편이나 자식으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피해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임시숙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개정된 스토킹범죄처벌법에 따르면 경찰은 스토킹 피해자가 요청하면 임시보호시설을 마련해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예산 부족과 적정 입지를 찾기 어려운 지자체들은 애를 먹는 게 현실이다. 이에 LH가 의왕시, 의왕경찰서 등과 3자협약을 맺고 경찰서 인근 주택을 세이프하우스로 무상 제공했다. 의왕시는 의료비∙법률지원, 경찰은 보안 관리를 맡기로 했다. 최종민 의왕경찰서 경위는 “피해여성들은 자녀양육, 경제활동 등의 이유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계속 생활할 수밖에 없어 2차 피해가 반복되기 쉬웠다”면서 “그러나 LH의 매입임대주택을 피해자 분리보호를 위한 임시숙소로 활용함으로써 범죄 재발 방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LH는 또 학대피해아동을 가해 부모로부터 분리하는 ‘즉각분리제도’ 시행에 발맞춰 학대피해아동을 위한 쉼터주택도 공급했다. 쉼터주택은 한 채라면 전용면적 100㎡ 이상에 방 4개, 화장실 2개를 충족해야 하고 두 채라면 합한 면적이 120㎡ 이상이어야 한다. LH는 연접형 2호 주택을 안양시에, 9월에는 1호주택을 안산시에 제공했다. 쉼터에는 사회복지사가 상주해 학대피해아동들을 돌보고 있다.

올해 말에는 인권침해아동을 위한 전용쉼터도 개설한다. LH는 경기도와 이달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전용쉼터 리모델링 공사를 마무리하고, 다음달 장애아동 입주를 시작할 계획이다.

앞서 LH는 지난 9월에는 경기 용인시 소재 주택 2호를 학대피해노인전용쉼터로 제공했다. 의정부와 부천에 민간주택을 임대해 쉼터로 활용해 온 경기도가 보다 안정적인 쉼터가 필요하다고 보고 LH와 손을 잡은 것이다. 용인시 쉼터에서는 일시 보호 및 숙식지원뿐만 아니라 심리치유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LH 관계자는 “범죄 및 학대 피해자, 발달장애인, 자립준비청년 등을 위한 주거복지 서비스를 시행하는 데 지자체 힘만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면서 “지역 수요를 사전에 파악해 지역특성과 입주수요에 맞게 적기에 공급되도록 수요맞춤형 매입임대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범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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