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병원 내부엔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대다수가 20·30대로 보이는 젊은 환자들이었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생존자와 유가족, 목격자는 물론 미디어를 통해 사고 상황을 간접적으로 접한 이들도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고 있다.
정신과에 대한 인식은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해외에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하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진료비 지출 중 정신건강의학과가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머물렀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4.0%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지만 쉽게 병원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한국인을 위해 쉽고 재미있게 정신질환에 대한 전문적 정보를 들려주는 이들이 있다. 팟캐스트에서 시작해 유튜브까지 플랫폼을 확장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모임 '뇌부자들'을 지난달 4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의원에서 만났다.
약 15년 지기인 정신과 전문의 3인이 진행하는 이 방송은 처음에는 팟캐스트로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에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이들은 2017년 3월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만들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줄이자'는 취지로 허규형(38) 전문의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허 전문의는 "인터넷에 병원 진료에 대한 다양한 후기는 있지만 정신과는 아무리 검색해봐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2019년 1월에는 유튜브에서도 활동을 시작, 현재 13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방송을 시작한 2017년에만 해도 개인 방송을 하는 전문의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연배가 높은 이들은 "본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고. 하지만 5년 넘게 꾸준히 해온 지금은 시선이 달라졌다. 김지용(39) 전문의는 "최근엔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이 전공의들에게 우리 영상을 틀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동훈(36) 전문의는 "얼마 전에 동문회를 갔는데 연배 있는 선생님들이 먼저 '유튜브하는 선생님 아니냐'며 먼저 인사를 해주시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의료 현장에 있는 이들은 정신건강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음을 매일 체감한다고 밝혔다. "이전에는 중증 정신질환자분들만 병원에 왔다면 이제는 사소한 문제를 갖고 오는 분들도 많아요. 또 중년 남성들은 마음의 병을 감추는 경우가 많은데, 발표 공포증으로 오는 회사 임원분들도 많죠."(김지용)
"저희 병원은 소아정신과 위주로 보는데 유치원 친구 부모님 소개로 오는 아이들도 많아지고 있어요. 또 의외로 노인분들이 찾아오시는 걸 보면서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게 많이 쉬워졌구나'라고 느끼기도 하죠."(오동훈)
정신과 문턱을 낮추기 위해 시작한 방송인 만큼 방송을 통해 진료를 시작하게 됐다는 피드백이 가장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허 전문의는 "팟캐스트 초창기부터 방송을 듣다가 의사를 꿈꾸게 되면서 의대를 진학하게 됐다는 독자 사연도 있다"고 전했다.
'뇌부자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콘텐츠 외에도 △영화나 책 등 작품 속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는 콘텐츠 △사연에 대한 답을 하고 키워드를 하나 꼽아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콘텐츠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 외에도 '정신과 의사들의 소개팅 능력고사 문제 풀기', '유튜브 구독목록 공개' 등 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상도 종종 내보낸다.
오 전문의는 "방송 초창기에는 긴장도 많이 해서 조사(助詞)까지 다 들어간 대본을 준비하고 읽었다"며 "지금은 세 명의 합도 잘 맞아 대본 없이도 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고 말했다.
이들은 본인들만의 특징을 '무해함'이라고 꼽았다. 오 전문의는 "어떻게 보면 재미가 없을 수 있으니 단점이긴 한데, 환자마다 개개인의 편차가 커서 우리는 사연을 받아도 단정짓는 것을 지양하려고 노력한다"고 전했다. 김 전문의는 "자격 없는 사람일수록 단언을 많이 하고 확신을 갖고 이끌어간다"며 "물론 '몇 분 만에 우울 낫는 법' 이런 섬네일을 보면 눌러보고 싶긴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허 전문의는 "확신이 필요해서 그런 채널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좋은 피드백이 있다면 악성 댓글도 있는 법. 김 전문의는 "언젠가부터 과학이나 전문가를 공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며 "가끔 (약을 권하면) '제약회사 사주를 받았냐'는 등의 어이없는 공격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하지만 우리는 의사로서 약의 효과를 매일 목격하고 있다"며 "부작용도 직접적으로 보고 듣고 있는데 그걸 의심하는 분들이 왕왕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오 전문의는 "전문 상담과 약의 효용성만 부정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신과 문을 두드리고 싶으나 고민이 되는 이들도 많을 터. 이들에게 '꼭 문을 두드려야 하는 상태의 기준'을 물었다.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분은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안다는 방증이죠."(오동훈)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는 '수면과 식욕의 변화나 흥미 감소'(허규형), '단순한 우울감을 넘어서서 본인의 기분을 잘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김지용) 등이 있다.
물론 정신과를 찾았으나 본인과 맞지 않아 발길을 끊는 환자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 김 전문의는 "정신과에는 약물 위주의 치료를 하는 곳, 길게 상담을 하는 곳, 정신분석 위주로 하는 곳 등 다양한 시스템이 있는데 그에 대한 안내를 하는 작업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오 전문의도 "요새는 병원 홈페이지에 초진과 재진을 몇 분씩 하는지를 고시하기도 하니 미리 확인하고 간다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신과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들을 준비'와 '기다릴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들은 조언했다. 허 전문의는 "다른 과와 달리 정신과의 경우 바로바로 치료의 결과가 안 나올 수 있다"며 "그걸 참고 기다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의 매력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라고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치료의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료법이 딱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 정신과의 매력인 것 같아요. 정해진 답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환자 한 명에 따라 맞춰서 돌봐드리는 거죠."(김지용)
"정신과는 (환자에 대한) 개입 영역도 넓어요. 가족 관계에서부터 인생 진로까지 환자의 전반적인 환경을 바꿔줄 수 있죠." (허규형)
정신과의 문을 아직도 못 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선 무엇이 더 필요할까. 허 전문의는 "'질병=인성 혹은 성격'이라는 인식이 사라져야 한다"며 "우울증은 그저 뇌기능이 저하돼 있는 것일 뿐이며, 우울증마다 그 증상도 다 다르다는 사실이 더 알려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문의는 "중학생 시절 생물을 배울 시기부터 '정신질환은 뇌질환'이라는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며 "인종이나 남녀차별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처럼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도 더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오 전문의는 "정신과 검진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보험 문제도 있다"며 "보험사가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이들의 보험 가입 신청을 거부하는 일이 여전히 잦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