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 본사 앞에 생긴 '화단'... 시위 막는 꼼수? 묘수?

입력
2022.11.16 04:00
10면
SPC 본사 앞 천막농성 부지 화단 조성
노조 "집회·시위 원천 봉쇄 의도" 반발
구청 "시민 불편 반영한 행정조치" 반박

최근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 본사 앞 인도 한복판에 화단이 생겼다. 민주노총이 1년 가까이 천막 농성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다. 노조는 합법적 집회ㆍ시위를 원천봉쇄하려는 ‘꼼수’라고 반발한다. 반면 구청 측은 주민 편의를 위한 ‘묘수’라고 일축한다.

노사 합의 직후 농성장이 화단으로

서초구청은 5일 SPC 본사 앞 인도에 5m 넘는 아름드리 가로수 3그루와 허리 높이 나무 20여 그루를 심어 가로 약 8m, 세로 약 1m 규모의 화단을 조성했다. 구청 소유인 해당 부지는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는 ‘공개공지’다. 녹지 조성에 법적 문제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노조는 오랜 기간 천막 농성장으로 쓰인 상징적 장소를 화단으로 바꾼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노조(화섬노조) 파리바게뜨지회는 지난해 12월부터 여기서 노숙 농성을 이어 왔다. 불매 동참 기자회견, 야간 집회 등이 꾸준히 열렸다. 그러다 노사 합의를 통해 3일 천막을 치우자마자 서초구가 녹지로 꾸민 것이다.

노조는 구청이 내세운 녹지 조성 사유도 앞뒤가 안 맞는다고 주장한다. 천막 농성 당시 ‘시민 통행을 방해한다’며 철거를 요구했는데, 화단 조성 후 오히려 인도 폭이 더 좁아졌기 때문이다. 실제 화단에서 3m 떨어진 곳에 공공자전거 ‘따릉이’ 대여소가 있고, 5m 거리에는 버스정류장이 위치하는 등 시민 왕래가 잦다. 임종린 지회장은 15일 "다시는 SPC 본사 근처에서 투쟁하지 말라는 경고”라고 비판했다.

구청 측은 인근 주민들이 시위로 극심한 불편을 호소해온 만큼, 당연한 행정조치라는 입장이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공개공지를 특정인, 특정단체가 점거하는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집회의 자유 vs 시민 기본권

비슷한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서초구는 지난해 8월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왕복 4차선 도로 약 130m 구간에 대형 화분 154개를 설치했다. 직업병 피해자, 해고노동자 단체들의 단골 집회 장소였다. 서울 중구청도 2013년 쌍용자동차 사태 당시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이던 해고노동자들의 천막을 철거한 후 화단을 만들어 마찰을 빚었다. 도로변이나 공터에 녹지를 조성하는 행정 행위가 사실상 집회ㆍ시위를 막기 위한 ‘우회로’로 변질됐다고 노조가 지적하는 이유다.

집회의 자유와 시민 기본권 중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가 의견도 엇갈린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지자체는 집회 장소로 쓰이던 공용 공간에 녹지 등을 마련하기 전에 집회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시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집회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집시법 개정 논의 때 이런 부분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주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