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서 이기는 새우가 되기 위해

입력
2022.11.11 10:26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시진핑 집권 3기의 중국은 과학기술 혁신과 자립을 핵심 국가 발전 전략으로 내세웠다. 국제질서 재편 능력을 가진 유일한 경쟁자로 중국을 지목한 미국의 움직임에 응수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술주권 확보 없이는 우리나라도 생존을 모색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작금의 위기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초격차 기술, 틈새를 노리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의 개발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조역량을 갖추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국가전략기술 육성방안’이 반가운 이유이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탁월한 추격자였다. 하지만 전략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일례로 올해 양자기술 분야 투자액은 미국이 1조원, 중국 3조4000억원에 이르지만, 우리는 700억원 선이다. 기술력은 세계 최고 대비 63% 수준에 불과한 것이 우리 양자컴퓨팅 기술의 현주소다. 승자독식의 냉혹한 법칙이 지배하는 전략기술 분야에서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의 형국인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묘수는 무엇일까?

스코틀랜드 출신 기계 수리공이었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이 산업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 있었던 정부와 산업계의 노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임스 와트의 특허 유효기간을 이례적으로 25년이나 연장해 준 영국 의회의 조치는 와트의 증기기관이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와트에게 사업가 매튜 볼턴이 합류하면서 산업용 증기기관의 보급이 가능해졌다. 국가적 중요성을 갖는 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산업계의 공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다.

증기기관의 역사가 일러주듯 위대한 기술 혁신은 정부와 민간의 합작품이다. 이번 전략기술 육성방안에서도 민관 협업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강조되었다. 산·학·연 협력과 개방형 혁신을 통한 임계규모 한계 돌파만이 우리나라가 기술패권 경쟁의 고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이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먼저 민간을 정책의 수혜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혁신의 동반자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 다양한 주체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수평적 협력의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정부가 맡아야 한다. 민간 기업이 정부 연구개발 전반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한 ‘산업별 민간R&D협의체’와 같은 시도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부처 간에도 개방과 협력의 자세가 절실하다. 사업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과 칸막이는 없어져야 한다. 국가 R&D 사령탑 역할을 맡아야 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기술주권 확보 관점에서 범 부처 협력을 이끌어내도록 리더십을 보여야겠다.

민간에서도 정부의 노력을 신뢰하고 정책 이니셔티브가 결실을 맺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 각계 최고 전문가들이 세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목표를 포함한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이것이 정부의 지원전략에 정교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석탄, 방직산업이 핵심 먹거리 산업으로 부상 중이었다. 광산 갱도에서 물을 퍼올리는데 말의 힘에 의존했던 전통 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증기기관 개량은 당시 고난도의 기술 과제였다. 이번에 발표된 12개 전략기술의 성패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21세기 기술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새겨야 할 역사 속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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