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물 생산국들은 이제 더 이상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예전엔 외화를 벌기 위해 순순히 광물을 수출하던 이들 나라는 이제 희소 광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훨씬 영악해졌다. 광물 생산국들은 자국 땅에서 나는 자원을 이용해 안보·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자원시장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주요 광물 수출국들이 자국산 희소 광물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경향은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졌다. 자원 부국들은 희소 광물을 아예 국유화하거나(멕시코), 광물을 사가는 선진국을 상대로 "우리나라에 공장을 설치해 원료를 사용하라"는 압력(인도네시아)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원이 국제정치의 무기가 되자 광물에도 '이념의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광물 수출국이 친미 진영에 속하는지, 아니면 중국·러시아에 가까운지에 따라, 아예 광물을 팔 수 있는 판로 자체가 달라지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제는 원자재, 특히 반도체·휴대폰·배터리 등 첨단 제품에 필수적인 희소금속 쪽에서는 경제학 원리가 아닌 지정학 원리에 따라 국제 공급망이 형성되는 중이다.
이런 변화에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이 금융 제재에 나서자 곧바로 천연가스를 무기화했다. 유럽으로 향하던 천연가스 파이프를 통제했고, 이 때문에 유럽은 큰 타격을 입었다. 겨울이 오기 전이었음에도 전기·가스 요금은 몇 배로 치솟았고 소매사업자들이 도산했다.
특히 배터리 주원료인 니켈은 "3대 생산국인 러시아가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가격이 요동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월 24일) 직후인 3월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의 톤당 니켈 가격은 이틀 새 3.5배 폭등(2만8,700달러→10만1,365달러)했고, 결국 LME는 145년 역사상 처음으로 일시 거래 중단을 결정했다.
러시아가 천연가스에 이어 니켈마저 무기화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퍼지자 2분기에는 국제적인 사재기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각종 금융제재를 가하는 한편으로 러시아산 니켈 수입을 크게 늘렸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3~6월 러시아산 니켈 수입량은 2,395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0.2% 증가했다. 같은 기간 유럽의 수입량도 22% 증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나 중국이 실제로 핵심 광물에 대한 구체적인 수출금지 조치에 나선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럽이 공급망 재편에 서두르고 있는 것은 그만큼 광물 시장에서 러시아와 중국산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니켈 시장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전체 공급량에선 3위지만, 인도네시아(1위)와 필리핀(2위)과 달리 1등급(순도 99.8%) 황화광 니켈을 생산한다. 산화광 니켈보다 탄소 배출이 적어, 탄소중립 정책에 나선 유럽은 특히나 러시아 니켈에 의존한다.
아직 현실화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제 니켈 시장을 쥐고 흔들 개연성은 여전히 충분하다. 배터리용 니켈 생산의 15~20%를 공급하는 러시아 회사 노르니켈(Nornickel)의 최대 주주는 푸틴 대통령의 측근이자 '니켈의 왕'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포타닌이다. 이 회사는 최근 푸틴의 또다른 측근 올레그 데리파스카가 이끄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업체 루살(Rusal)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핵심 비철금속 2종(알루미늄·니켈)의 통제권을 한 손에 쥐게 되는 셈이다.
친미 진영에 속하지 않고 중국·러시아와도 거리를 둔 제3세계 자원 부국들의 자원 보호주의도 갈수록 심해지는 모습이다.
냉전기 비동맹운동의 한 축이었던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인 국가. 니켈 매장량과 생산량에서 모두 1위인 인도네시아는 현재 니켈의 원광(原鑛·제련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광석)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자국 내 제련소에서 제련을 거치거나, 아예 니켈을 쓰는 배터리 공장을 자국 내에 세우도록 니켈 수입국을 압박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인도네시아의 이런 조치에 반발해 이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상태지만, 인도네시아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조코위 대통령은 "국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선 조금 미쳐야 한다"며 "예전엔 광석 수출로 연평균 11억 달러를 벌었는데, 이제는 니켈 제품 수출로만 연 208억 달러를 번다"고 효과를 설명했다.
특정 광물의 공급량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해 '광물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다. 바릴 라하달리아 인도네시아 투자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니켈·코발트·망간 등 우리가 보유한 광물과 관련해 OPEC과 유사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칠레·아르헨티나·볼리비아 등 '리튬 트라이앵글' 국가들도 OPEC과 유사한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 논의 중이다.
멕시코는 올해 4월 리튬 국유화를 선언하고 리튬 생산 국영기업을 만들기도 했다.
①공급을 통제하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고 ②자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치적 무기로 삼으려는 중립지대 국가들을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해법은 바로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이다. 신뢰할 수 있는 우호국과 함께 공급망을 새로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은 6월 영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일본 한국 호주 핀란드 스웨덴 유럽연합(EU) 등으로 구성된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이라는 다자간 협의체를 출범했다. 미국 중심으로 뭉친 서방 선진국의 광물동맹 성격이다.
중립지대 자원 부국을 포섭하기 위한 구애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MSP는 광물 주요 생산국인 아르헨티나(리튬), 브라질(니켈), 콩고민주공화국(코발트) 등 8개국을 초청해 논의를 진행했다.
동맹과 포섭에 집중하는 한편, 미국은 중국 등 적대국가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규제하기 위한 법도 만들었다. 미국이 8월 제정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에서 생산한 배터리 재료(광물)를 40% 이상 사용해야만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했다. 이 비율은 2027년 80%까지 높아진다. EU도 러시아와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유럽 주요 원자재법' 제정을 공식화했다.
광물이 정치적 고려 대상이 되면서, 이를 값싸게 안정적으로 사용해야 할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언스트&영(EY)이 올해 6~8월 세계 주요 광물 및 금속회사 최고경영진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광물·금속 업계는 내년에 가장 신경 써서 고려해야 할 리스크 중 '지정학적 위험'을 두 번째(1위는 ESG 경영)로 꼽았다. 지정학 변수는 작년 같은 기간 중 진행된 설문조사 순위(6위)보다 네 계단 상승했다. 응답자 72%는 "자원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세금, 로열티, 국유화 등 국가의 요구가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고 "운영 비용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답도 64%에 달했다.
원자재 공급망이 불안해지면서 전기차 시대가 애초 예상보다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자동차 시장조사업체인 S&P 글로벌 모빌리티에 따르면 기존 전망대로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며면 테슬라 한 회사만 따져도 연간 약 13만 9,000톤의 니켈이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북미와 유럽이 처리할 수 있는 배터리용 니켈은 14만 6,000톤에 그친다. 매년 82만 4,000톤을 처리하는 중국을 빼놓고는 전기차 시장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게 S&P 글로벌 모빌리티의 지적이다. 보고서는 "지정학적 문제로 훼손된 공급망은 배터리 생산에 영향을 미쳐 전기차 도입을 늦추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