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들이 흰 화환을 물고 어둡게 채색된 하늘을 난다. 핼러윈 호박이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며 등을 토닥이는 손짓이나 "도와달라"고 외치는 군중도 보인다.
‘이태원 참사’로부터 일주일 남짓이 흐른 지난 7일,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 공간에 놓인 그림들의 내용이다. 형식과 주제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림들에 담긴 의도는 분명하다. 슬픔을 타인과 나누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추모 시민들은 글과 그림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이따금 눈을 훔치기도 한다. 때로는 그림이 말보다 강력하다. 미술이 애도의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국가애도기간은 종료됐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추모 공간에는 그림들이 나날이 늘었다. 직접 그린 그림도 있고 엽서처럼 보이는 그림도 있다. 초기에는 국화꽃을 그린 손바닥만 한 그림들이 조화들 사이에 놓이더니 7일에는 액자에 넣은 그림들도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짧은 글이 쓰인 그림도 있다. 유령이 울음을 터뜨리며 "희생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하거나 전사들이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이 땅은 우리가 지킬게요"라고 외치기도 한다.
추모 그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공간에서도 잇따라 올라왔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이태원참사피해자를애도합니다’ 등의 추모 관련 해시태그(#·검색용 단어)를 검색하면 다양한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조화뿐만 아니라 버려진 운동화나 만화를 그린 그림들도 있었다. 간혹 추모 관련 내용이 없는 상업적 홍보물에 해시태그를 붙인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추모 게시물이다.
미술 전문가들은 그림을 통한 애도는 고대부터 이어져온 미술의 근원적 기능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시각적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 의도를 드러내고 타인이 여기에 공명한다. 이는 새로운 글과 그림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가 저서 ‘애도하는 미술’에서 죽음은 언제나 사회적 현상이었고 오랫동안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고 강조한 이유다. 크로마뇽인들이 남긴 동굴 벽화에도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죽음이 일으키는 파괴에 인간이 ‘이미지’라는 재생으로 저항한다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최근 통화에서 추모 공간의 그림들도 이런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시각적 행위를 통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면서 “죽음을 초래한 원인과 사고 예방책을 생각해 보고 또한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일련의 행위”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추모 그림들 가운데는 '희생자들의 한을 우리가 풀어드리겠다' 등의 메시지를 담은 것도 있다. 박 교수는 “죽음을 촉발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원통함에서 일상으로 귀환하지 못한다”면서 국가애도기간과 별개로 “참사의 원인이 정확히 규명돼야 사람들은 망자들을 보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추모 글이나 그림들은 용산구가 서울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지상에 마련한 합동분향소가 아니라 사고 현장 인근인 이태원역에 집중적으로 놓였다. 국가가 주도한 공간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추모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고동연 미술 비평가는 "19세기나 20세기 초에는 국가가 애도를 주도했고 전쟁이나 사고의 '극복'에 방점을 뒀다"며 "시련을 극복하는 형상의 조각을 세우거나 애도기간을 정하는 게 당시의 대표적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국가 주도 애도가 기간을 정하고 특정한 상징물을 내세우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최대한 빨리 상처를 봉합하고 국민들을 일상으로 복귀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같은 애도 방식이 희생자 유족이나 시민들의 내면적 트라우마까지 치유할 수는 없다. 시민들의 자발적 추모는 국가가 해소해 주지 못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길인 셈이다. 현대미술이 주목하는 것도 자발적 애도다. 고 비평가는 "현대 미술은 '빨리 잊으라'고 말하지 않는다"면서 "1990년대 이후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에서 조성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기념 공간들이 추모 장소만 제공하는 텅 빈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도 시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토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모 그림의 소재는 다양하다. 국화 꽃 등 조화를 그려서 위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그림이 흔하지만 슬픔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인스타그램에 '#prayforitaewon(이태원을 위해 기도한다)' 해시태그를 달고 4일 전 올라온 한 그림에는 사람이 검게 칠해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림에는 '내가 몰랐던 것들이 아주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게시자는 함께 올린 글에서 휴대폰으로 매일 뉴스를 읽었다면서 '애도하는 법' '뉴스를 제대로 보는 법' '심폐소생술 하는 법' 등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고, 슬픔을 함께 나눠야겠다고 이야기한다.
인스타그램의 또 다른 게시물에는 벗겨진 신발 앞에 무릎 꿇은 사람이 그려져 있다. 고 비평가는 '주인 잃은 신발'은 미술가들이 애도 작업을 진행하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대표적 소재라고 설명했다. 신발은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는 않되, 꽃보다 더 선명하게 희생자들을 기억토록 하는 상징물이다. 고 비평가는 "추모 그림의 다양한 형태는 시민들이 각자의 눈높이에서 슬픔을 다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라우마치유센터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에서 활동했던 허심양 임상심리전문가는 "그림 등을 통해서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고립되지 않고 연결돼 있다고 느끼게 하는 점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추모 그림이나 글에만 오랫동안 몰입하면 일상을 이어가기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그는 “유족이나 부상자 등에게 일상을 이야기하기에는 굉장히 성급한 시기”라면서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상황이 다르다. 추모 관련 그림이나 글만 찾아본다면 우울감을 느끼는 시기가 길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허 전문가는 또 추모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그 내용이 유족이나 부상자, 참사 관련자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사전에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무엇보다 애도에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애도를 해라" 혹은 "하지 말아라"는 식으로 의견을 강요하는 것은 금물이다. 논쟁이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허 전문가는 "누군가는 음악이나 그림을 통해서 애도하고 마음을 전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그냥 생각만 할 수도 있다. 무감각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며 "애도에 정해진 방법이나 기간은 없다. 서로의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