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 시작한 증오의 문법이 사회 양극화를 가파르게 하고 있죠. 그럼에도 상식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고, 이들이 모이면 '제2근대화'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학계의 거목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전히 ‘중민(中民)’의 힘을 믿는다. 그는 1980년대 ‘중산층이면서 민중과 연대한 시민’인 중민 세대가 사회개혁을 이끌 것이라는 ‘중민이론’을 개념화했다.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 불합리를 바로잡으려는 개혁적 행위'가 핵심이다. 넥타이 부대가 참여한 6ㆍ10 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이 독재권력과 맞서면서 한 교수의 이론이 평가를 받았다.
그가 이사장을 맡은 중민재단이 올해로 창립 10주년(11일)을 맞는다. 전화로 만난 한 교수는 "분열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사이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보듬으려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로 중민"이라며 "대립의 현실을 넘을 잠재력을 가진 집단"이라고 역설했다. "대립의 악순환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죠. 이런 현실일수록 중민의 가치를 전파하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가 "전대 미문의 위기에 빠진 것"도 한 교수가 중민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배경이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서구 사회를 빠르게 따라잡는 데 성공했지만, 곳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온다. 기후위기, 코로나19 등 전 세계가 겪는 문제 외에도 산업재해, 환경파괴, 묻지마 범죄, 성폭력과 성희롱 등이 한국 사회의 특징적 위험이다.
한 교수는 "이 같은 '위험사회'의 요소를 넘어서 '제2근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그 잠재력은 충분하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보면 시민들이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게 나타났다”며 “고도로 개인화된 서구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라고 했다. 한 교수는 다만 중민 정신을 가진 이들이 정치적으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누적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11일 서초구 중민재단에서 열리는 10주년 학술 세미나의 키워드가 ‘젊은 여성’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 교수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때는 젊은 대학생들이 주체가 됐는데, 이후 이들이 한국 정치를 이끄는 정치 집단이 됐다"면서 "코로나19 팬데믹과 페미니즘 등으로 여성들의 의식이 각성됐고, 향후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정치’의 흐름을 이끌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미나에서는 심영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우리는 왜 새로운 변동주체로 젊은 여성에게 주목하는가'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다.
한 교수는 독일의 세계적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93) 연구 권위자다. 서구 지식인들은 개성적인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매료된 경우가 많은데, 하버마스는 역동적이고 윤리적인 한국을 “동양을 이끌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봤다. 하버마스가 '소통이론'의 대가라는 점에서 소통이 부족한 한국사회가 경청해야 할 지식인이다. 이런 생각을 담아 지난달 하버마스와의 인터뷰 등을 엮은 ‘하버마스와의 대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앞으로는 사회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재단 차원에서 '사회포용대화' '위험파수꾼' '세대공감' 사업을 역점적으로 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10주년 세미나에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축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