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삼성’의 S자만 봐도 분통이 터질 때가 있었다. 재벌·대기업의 폐해로 언급되는 여러 문제의 중심에 삼성과 그 창업자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끼눈을 뜨고서 이 기업을 보다가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대목이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도체 산업에서의 성공, 나아가 이 때문에 이 기업이 차지하는 한국 경제에서의 위상.
그래서일까. 최근 세계 반도체 산업의 혼란과 삼성전자의 불안한 미래를 보면서 답답해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다. 미국, 유럽, 중국 등이 일제히 반도체 산업을 기간 산업으로 여기면서 총력을 다해서 지원하고 보호한다. 그 과정에서 무슨 군사 동맹 같은 ‘칩4 동맹(Chip 4 Alliance)’ 같은 단어도 등장했다.
메모리반도체에서 20년간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해온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의 지위도 흔들리는 중이다. 일찌감치 다른 길(‘파운드리’)을 개척한 대만의 TSMC 같은 기업의 위세에 삼성전자마저도 기가 죽은 모양이고, 이 틈에 메모리반도체마저도 중국 기업의 추격이 거세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삼성전자가 몰락한다면 한국 경제와 산업의 경쟁력은 말할 것도 없이 결정타를 맞을 테다. 삼성전자 주식에 시쳇말로 ‘물려’ 있는 소시민의 주머니 사정까지 염두에 두면 불안감은 더욱더 커진다. 도대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최근 나온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의 '반도체 삼국지'(뿌리와이파리)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다. 이 책은 한때 반도체 강국이었던 일본의 부상과 몰락을 짚으면서 시작해, 후발 주자 중국의 무서운 굴기와 한계, 결정적으로 일본의 지위를 물려받은 한국의 현실과 미래를 짚고 있다. 책 제목대로 정말로 그 옛날 ‘조조-유비-손권’이 천하를 차지하고자 싸웠던 ‘삼국지’를 읽는 듯하다.
사실, 권석준이 저자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제목이 그럴듯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와 MIT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 저자는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반도체 신소재 전문가다. 학계와 기업의 내로라하는 전문가가 인정하는 ‘반도체 과학자’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묻는 전략서를 써냈으니 관심을 두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저자는 연구와 함께 세계 반도체 기업의 내부 인사와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이 산업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런 사정을 사석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그런 고급 정보가 책 한 권으로 정리되어서 나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은 이 놀라운 책을 허투루 지나치는 한국의 정치인, 기업인, 관료의 무신경함이다. 이 책을 내고 나서, 저자에게 곧바로 미국, 일본, 중국 쪽에서 연락이 왔단다. 장담컨대, 중국에서는 이 책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반도체 산업에 관심이 깊은)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보고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용산과 세종만 왜 이리 한가한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시민의 반응이다. 나온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고, 작은 출판사에서 광고도 못 했는데도 눈 밝은 독자 여럿이 먼저 읽고서 입소문을 내고 있다. 바라건대, 요즘 출판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톡톡히 하는 전 대통령도, 책보다는 술을 좋아하는 것 같은 현 대통령도 그 독자 대열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현장의 반도체 과학자가 쓴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걸러지지 않은 전문 용어의 지뢰만 건너뛰면 흥미진진한 산업사, 기업사, 기술사 즉 역사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욕심이 있다면, 관심사가 남달리 넓은 저자가 꼭 약속했던 나머지 책 두 권도 써주면 좋겠다. ‘빛의 과학’과 ‘패턴의 과학’.
과학책 초심자 권유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