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단 말이오?" 화선지에 그려진 사내를 본 적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선비에게 돌아온 건 면박이다. 양반집 규수에 봉변당한 사내는 가수 겸 배우 비. 그는 5일 방송된 tvN 드라마 '슈룹'에 깜짝 등장했다. 드라마 '풀하우스'(2004)로 사랑받고 영화 '닌자 어쌔신'(2009)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비가 사극에 출연하기는 처음이다. 당황한 시청자 반응을 보여주듯 온라인엔 '슈룹(우산의 옛말)이라 비가 내린 건가'란 글이 여럿 올라왔다. 비는 '슈룹'의 감독, 작가와 단 한 번도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없다. 비의 깜짝 출연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8일 '슈룹' 제작진에 따르면, 비는 극에서 그를 홀대한 양반집 규수 청하(오예주)와의 인연으로 우정 출연했다. 비는 오예주의 소속사 레인컴퍼니의 수장이다. 비가 회사의 신예를 지원사격하기 위해 촬영장을 찾은 뒤 카메라 앞에서 악연으로 재회해 재미를 준 것이다.
사연 없는 카메오 출연은 없다. K콘텐츠 속 이색 등장엔 대중문화계의 인맥이 깔려 있다. 올여름 충무로를 강타한 '헌트'에서 귀순한 파일럿 이웅평으로 깜짝 등장한 황정민은 친분 캐스팅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그는 이 영화 특별 출연을 자청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이정재와 정우성이 함께 '헌트'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황정민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신세계'(2013)에서 이정재와 연기 호흡을 맞췄고, '아수라'(2016)에선 정우성과 친분을 쌓은 사이. 특별 출연 배역이 북한 출신으로 정해지자 그는 북한말을 한 달 동안 연습한 뒤 카메라 앞에 섰다.
진선규의 드라마 '악귀'(2023년 방송) 특별 출연도 김은희 작가와 김태리와의 우정으로 성사됐다. 진선규 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김 작가와 '킹덤' 시즌2(2020)로 인연을 맺었고, 김태리와는 '승리호'(2021)에 함께 출연한 뒤 '호형호제' 한다. 이 관계를 토대로 '악귀' 제작진은 진선규에게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구산영 즉 김태리의 죽은 아빠 역을 맡겼다. 그는 캐릭터를 '잘 죽이는' 작가로 유명한 김 작가의 작품에서 '킹덤' 시즌2에 이어 또 죽는다. 깜짝 등장에도 '죽음의 세계관'이 이어지는 셈이다.
티빙판 '오징어 게임'으로 요즘 입소문을 타고 있는 '몸값'에선 모델 출신 배우 장윤주가 마지막 회 엔딩 크레디트 뒤에 뜨는 쿠키 영상에 깜짝 등장한다. 그는 올여름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1'에서 함께 총을 쏜 전종서와의 친분 등을 계기로 '몸값'에서 다시 총을 잡았다.
깜짝 등장의 무대는 유행을 타고 변한다. 노르웨이 가수 페더 엘리아스는 최근 광주 남구에서 진행된 KBS1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다. 외국 가수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는 이례적이라 녹화장을 찾은 관객들도 깜짝 놀랐다. 20대인 Z세대 외국 가수는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올라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광주!"라고 인사한 뒤 쿨의 '아로하' 등을 불렀다는 게 소니뮤직코리아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설명이다.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그는 한국 팬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전국노래자랑'을 택했다. 마블 영화 '데드풀' 시리즈로 친숙한 라이언 레이놀즈 등 그간 해외 스타들은 깜짝 등장 무대로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을 주로 찾았다. 김신영이 새 진행자로 나선 뒤 '전국노래자랑'이 MZ세대에 주목받자 내한한 해외 연예인들의 '핫플'로 떠오른 것이다. 엘리아스는 본보에 "'전국노래자랑' 출연으로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팬들을 만나며 한국에 더 많은 친근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깜짝 등장의 무대는 새 권력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지난 7월 '하이브(Hybe) 19층'은 트위터 실시간 검색어로 두 번이나 올랐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그룹 방탄소년단 소속사의 사옥으로, 2030부산세계박람회 홍보대사 위촉식과 방탄소년단 멤버 제이홉의 첫 솔로 앨범 청음회가 열린 곳이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하이브 소속이 아닌 빅뱅 멤버 태양(YG)과 배우 박서준(어썸이엔티) 등이 이곳에 깜짝 등장했다. 대기업 총수와 정부 요직 인사가 연예기획사를 찾기는 드문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K팝 기획사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