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국가 애도기간인 만큼 집회는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노래를 부르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집회의 정치적 성격은 명확했다. 진보단체는 이번 참사가 현 정부 탓이라며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고, 보수단체는 “세월호 사고 이후 뭐했느냐”며 문재인 정부 책임론을 꺼냈다. 일부 시민들은 참사 직후 열린 대규모 도심 집회에 “추모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진보 성향 단체인 ‘촛불승리전환행동(이하 촛불행동)’은 이날 오후 5시부터 서울 숭례문 교차로부터 태평로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차로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시민촛불’ 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 추산에 따르면, 2만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주최 측이 나눠준 검정색 ‘근조(謹弔)’ 리본을 가슴에 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으로 집회를 시작했다. 스피커로 시끄러운 노래를 틀거나,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참석자들은 “국민들이 죽어간다, 이게 나라냐”, “퇴진이 평화다”, “퇴진이 추모다”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었다. 윤 대통령과 정부 책임론을 부각한 것이다. 촛불행동은 “윤석열 정부는 참사 원인을 숨김없이 밝히고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며 “참사 책임을 회피하고 벗어나기 위해 여론을 조작하고 정치 사찰을 단행하는 제2, 제3의 범죄행각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보수 성향의 신자유연대는 삼각지역 인근에서 맞불 성격의 ‘윤석열 정부 퇴진 반대 및 추모집회 반대’ 집회를 개최했다. 무대에는 “세월호 사고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시스템과 제도 정비 안 하고 뭐했나”, “이태원 사고 사망을 정치적으로 이용 말자”라는 현수막이 달렸다. 이들은 참사 대신 ‘사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집회에 참석한 60대 정모씨는 “대통령에게 자꾸 사고 책임을 지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왔다”고 했다.
두 단체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난달 29일 삼각지역 부근에서도 ‘맞불’ 집회를 벌였다. 촛불행동 측이 당시 태평로에서 삼각지역까지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을 위한 촛불대행진’을 집회를 하자, 신자유연대가 이에 대응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두 단체의 충돌 가능성이 커지자 경찰은 대규모 기동대 병력을 용산 일대에 배치한 바 있다.
집회를 바라보는 시민들 시선은 엇갈렸다. 서울시청역 인근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홍모(27)씨는 “집단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면 정부 대응도 빨라지기 때문에 집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제도 개선은 결국 목소리가 모여야 가능하다”고 했다. 직장인 최모(39)씨도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고 공론화해야 이런 일이 재발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회를 통한 집단적 의사표현은 시민의 권리”라고 했다.
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시민들도 있었다. 용산구 주민 김모(60)씨는 “희생자 명복을 비는 추모 집회는 좋지만, 이들 얘기를 들어보면 결국 정치적 메시지로 들려 진정한 추모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대학생 장모(26)씨는 “이태원 참사 이후 집회가 많이 취소됐다고 들었는데 굳이 추모제를 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희생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방향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광훈 목사가 대표인 자유통일당 등은 매주 종로구 동화면세점 일대에서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를 이어왔지만, 이날은 집회를 열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도 같은 날 숭례문 인근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전국노동자대회를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