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에 허우적대는 상황, ‘살려달라’는 비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요.”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관련 유실물센터’. 나흘 전 참사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최세훈(39)씨는 말할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운 듯했다. 최씨는 다리를 절뚝이며 “사람들에게 깔려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다 쓰러져 있었다”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잠시 후 센터 안으로 들어간 그는 흙이 가득 묻은 검은색 가방을 발견하고 깊은 한숨을 토했다.
우리는 비극의 고통을 어디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 희생자들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고, 이제 이태원 참사는 수사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다. 철저한 수사를 거쳐 진상을 밝혀내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절차가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의 시효는 아직 가늠할 수 없다.
이번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 해밀톤호텔 앞 골목의 한 클럽에서 근무하는 A(26)씨는 요즘 사람 만나는 게 꺼려진다. 당시 겪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 때문이다. 골목에서 오도 가도 못 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문이 열린 그의 가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A씨가 다른 직원, 손님들과 합세해 정신 없이 심폐소생술(CPR)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술잔에 얼음이 떨어졌으니 더 가져다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A씨는 “그날 이후 인류애(愛)가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국가애도기간인 5일까지는 이태원 가게들이 휴업한다. 하지만 그는 “영업이 재개되어도 이태원으로 다시 갈 수 있을지 두렵다”고 토로했다. 근처 가게 직원들 역시 줄줄이 일을 그만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참사를 직접 목격한 B씨도 심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공보담당 공무원이라 언론 기사를 늘 봐야 하는데 그때마다 악몽 같은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그는 “직군을 바꿔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어렵사리 방문한 유실물센터에서 소지품을 챙겨 가지 못한 생존자도 있다. 센터 관계자는 “한 생존자가 본인 물건을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힘없는 목소리로 경찰관에게 버려 달라고 말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참사 충격은 점차 가족과 지인 등 주변인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이른바 ‘N차 트라우마’다. 이태원 참사에서 딸이 다친 C씨는 “딸도 요즘 힘든데 친구의 장례식장까지 가야 하는 현실에 너무 괴로워한다”며 “옆에서 그런 자식을 지켜봐야 하는 나도 힘들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장 목격자 친구를 둔 D씨 역시 “친구의 고통과 슬픔이 나한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친구 말을 들을 때마다 송곳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려면 치료와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 해결책은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위로 같은 굳건한 ‘연대’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백종우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회장은 “사회가 파편화할수록 개인이 트라우마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고, 비난은 고통을 악화시킨다”며 “지금은 참사를 진심으로 추모하는 등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함께 아픔을 극복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