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페미입니다. 헤어져야 할까요"

입력
2022.12.06 20:00
<11·끝>  페미니즘에 우호적이지 않은 20대 남성

편집자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뜻의 밈인 '무물'을 아시나요. 한국일보 허스펙티브가 성평등을 주제로 한 ‘무물 콘텐츠’를 격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대체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일상에서 흔하게 겪을 법한 다양한 고민 상황을 통해, 함께 성평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뎌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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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20대 취업 준비생입니다. 3개월 전 지금의 여자친구를 소개팅으로 만나 알콩달콩 즐겁게 연애를 하고 있는데요.

최근 들어 여자친구가 '페미'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듭니다. 휴대폰으로 페미니즘 관련 기사나 콘텐츠를 읽는 모습을 보이더니, 가끔 '젠더 갈등'과 관련해 이슈가 터질 때 저와 언성을 높여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두고 별 견해가 없다는 저를 향해 "여가부 폐지에 대해 의견이 없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생 남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온 것 아니느냐"며 쏘아붙이더라고요. 전 제가 특권을 갖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제가 알기로 '강성 페미'들은 남성을 혐오해 결혼이나 연애를 거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여자친구는 저를 만나기 전에도 소개팅을 여러 번 하며 연애를 의욕적으로 해온 걸로 알아요. 제 여자친구가 정말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그런 페미라면, 대체 저와 연애는 왜 하는 걸까요. 그리고 헤어져야 할까요. (최철수·27·취업준비생)

A. 철수님, 안녕하세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왜곡, 반동(백래시)이 극심한 요즈음, '여자친구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고민하고 계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연인들이 완전히 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겠지만요. 먼저 이 같은 질문으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철수님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요?

흔히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 혹은 '여권 향상'을 위한 활동이나 생각으로 이해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균형한 젠더 권력으로 구성된 세상을 조금 더 평등하게 만드는 움직임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죠.

여러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살펴보면요. 미국의 페미니즘 사상가 벨 훅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고 했어요. 여성학자 정희진은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라며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페미니즘의 도전)"이라 했어요.

게다가 성평등은 남성들에게 부과된 성 역할 부담을 경감하기도 합니다. 2018년의 연구에 따르면, 성평등에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남성들의 신체와 정신 건강에도 차이가 있었어요. 전통적 남성성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삶의 만족도, 관계만족도, 자아존중감이 커지는 경향을 보였어요. (마경희 등, '성불평등과 남성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젠더 권력의 불평등을 바로잡고,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데 동의하는 페미니스트 연인이 큰 문제가 될까요. 오히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여성 권리 향상에 힘을 보태는 결말을 상상할 수 없을까요. 성평등은 '제로 섬 게임'이 아닙니다.

Q. 성평등 좋죠. 여성 권리 향상도 동의하고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로 변질되었다고들 해요. 온라인에서 '한남충'이라는 단어가 난무할 정도로 남성에 대한 적대감도 크고요. 제 여자친구도 그런 생각에 경도되어 있을까 무섭습니다.

A. 페미니즘의 흐름 중에 남성과의 결합이나 인구 재생산을 거부하는 부류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최근 20대 여성들 내에서 확산하는 4B운동(결혼과 출산, 연애, 성관계 등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 운동)도 그 일례이지요. 이 모든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페미니즘뿐 아니라 어떤 사상이라 할지라도 개인에 따라 다양한 실천과 행동양식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철수님, 한국의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운동은 굉장히 많은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 왔습니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었고, 2005년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 경제와 사회제도 영역에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제도 중 유일하게 '여성할당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성 비례대표 할당제나 여성이사를 최소 1명 두게 하는 자본시장법(올 8월부터 시행)은 해외 사례에 비해 아주 궁색한 정도의 제도적 성평등 보정장치이지만, 그마저도 처벌규정이 없고 강제되지 않아 여성할당이 무척 더디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모든 상장기업에 비상임 이사의 40%를 여성으로 채우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여성 이사를 두게 하는 법이 몇 달 전 시행된 한국과는 사뭇 다르죠. 그 밖에 성범죄 피해 비율이나 빈곤율, 성별 임금 격차 등을 살펴보아도 대부분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에 한참 못 미칩니다. 법과 제도가 품지 못하는 사적 관계에서의 불평등은 어떻고요. '특권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온 것' 그 자체가 특권일 수 있는 것이고, '남성부' 같은 부처가 없어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특권일 수 있는 것이지요.

당장 철수님더러 페미니즘에 동의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와 연애를 이어나가실 계획이라면, 적어도 철수님이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페미니즘은 무엇이며 한국에서 어떤 변화를 이끌어 왔는가를 길게 설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과연 그것이 온라인상 마타도어나 왜곡이 아닌 실체적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기 위해서요.

Q. 솔직히 페미니스트와 연애를 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그 점만 제외하면 지금 여자친구가 무척 좋거든요. 자기 의견도 확실하고, 의존적이지 않은 모습에 반했어요.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해서도 이렇게 의견이 강할 줄이야... 원만한 연애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A. "사랑과 연애는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자유와 평등이 가장 첨예하게 각축을 벌이는 장이 되었고, 이런 긴장과 갈등은 섹슈얼리티를 통해 표출되며, 경제와 결혼 그리고 가족은 예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얽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친밀한 관계 맺기와 사랑에 대하여 젠더를 통해 풀어낸 책 '이토록 두려운 사랑'의 저자 김신현경은, 오늘날 사랑과 연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혼란 또는 두려움으로 뒤덮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은' 곳에서 남녀가 어찌 자유롭고 평등한 연애와 결혼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죠.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성평등'인 만큼, 친밀한 관계에서 상호 합의하에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연애를 발전시켜 나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말은 좋은데, 연애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요? 젠더무물에서 정리해드릴게요.


①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벗어나기

'헤게모니적 남성성(전통적 남성성)'특정 시공간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이라고 동의되고, 남성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남성성을 일컫습니다.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는 '규범적 가족 형태'로 여겨지는 4인 가족을 부양하고, 가부장의 권위를 누리며, 학벌이나 직업 등을 갖춘 남성을 표준적 남성으로 상정해 왔죠.

여성들도 사회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경제 활동을 하며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게 되면서 최근 들어 전통적 남성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어요. 모든 남성이 이 같은 남성성을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남성 집단 안에서도 우월한 조건을 갖춰 연애와 결혼을 수월하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해 자기비하에 빠지는 이들도 생겨나기 마련이죠. 이는 문화권을 가리지 않는데, 서양에서는 이처럼 지배적인 남성 집단에서 도태되어 연애와 결혼을 모두 포기한 채, 온라인에서 여성혐오 여론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인셀(involuntary celibacy·비자발적 독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 오히려 전통적 남성성에서 벗어날수록 남성 개인의 삶도 윤택해지고 관계맺기도 수월해집니다. 심지어 김신현경은 같은 책에서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의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여성성과 남성성을 습득해왔고, 때로는 저항해왔으며, 그 결과 친밀한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회에서 자신이 놓인 위치와 부여된 성 규범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더 나은 관계 맺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거죠.

철수씨는 어떤 남성인가요?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답답하거나 족쇄처럼 느껴진 적은 없나요?

② 페미니즘을 대안으로 상상하기

이한 성교육 활동가는 2019년 페미니즘을 접한 남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 결과 "많은 남성이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 자신의 삶이 변화했고, 자신의 삶부터 변화시켰다"고 답했다고 해요. 더 나아가 여성혐오 문화가 공공연하게 공유되는 남성 집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취하기도 합니다. 연구에 포함된 남성들의 말을 옮겨보자면요.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까지 제가 되게 남성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열등감이 있었어요. 그런 것에 대한 압박이 있었는데,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 '나는 그냥 나면 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생겼죠. 소위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졌어요."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에야 여성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그 이전까지는 부끄럽다는 식으로 생각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여성을 대상화, 타자화된 존재 외의 어떤 것으로 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로 '다들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됐고요."

③ 페미니스트 연인과 대화하기

남성 집단에만 속해 있다 보면 성평등에 무감각해지기 쉽지만, 기실 오늘날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첨예한 이슈로 부상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20대 여성 중 절반이, 남성 10명 중 1명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4년 전 결과임을 감안하면, 오늘날 이 간극은 더 벌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세미나의 '변화하는 남성성과 성차별(마경희)' 발표에 따르면, 페미니즘을 '신문, TV, 방송'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1인 방송, SNS' 등을 통해 접한 이들의 42.1%가 반페미니즘 성향을 보였어요. 반면 '주변인으로부터의 정보'로 페미니즘을 접한 경우 63.2%가 반성차별주의 성향을 보였고요. 위에 언급한 이한 활동가의 연구에서도, '전통적 남성성'을 거부하고 페미니즘을 삶에 들인 남성들은 공통적으로 연인, 친구, 직장 동료, 가족 등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이의 조력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해요.

철수씨가 지금까지 접한 페미니즘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 기인하나요? 페미니즘으로 인한 '남성 역차별' 주장의 대부분이 온라인상 정보에 근거하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여자친구와 이번 기회에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 참고 자료

-이토록 두려운 사랑(2018), 김신현경.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2017),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페미니즘의 도전(2005), 정희진.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성평등 정책의 확장을 위해>, (2019.4.18.)

- 마경희, 조영주, 문희영, 이은아, 이순미(2018), “성불평등과 남성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 서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이한(2019), "남성페미니스트를 찾아서: 페미니즘 운동 내 남성의 역할과 활동 고민", 서울: 서울NPO지원센터

※ '젠더무물' 연재를 11회로 종료합니다. 허스펙티브의 새로운 연재와 뉴스레터로 다시 만나요!




이혜미 허스펙티브랩장 herstor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