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박물관이 고구려 역사를 감추려는 모습이 화제다. 우리 민족인 고구려는 기원전후를 시작으로 700여 년 동안 한반도 중부에서 중국의 만주 남부까지 광활한 땅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가 들춰지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 벽에 그려진 수렵도를 보면 고구려인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고구려 사냥꾼들이 말을 달리면서 활로 호랑이나 사슴 등을 겨누고 있고, 심지어 그림 위쪽의 백마를 탄 사냥꾼은 몸을 돌려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다루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 벽화는 의복, 말, 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흔적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은 물감의 보존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전문 화가의 솜씨일 것이다. 한편, 이 그림은 예술적으로도 매우 빼어나다. 그림의 상징, 구도, 배치, 색감 등 여러 부분이 우수하지만, 역동성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활쏘는 사람의 자세가 그렇지만, 특히 말의 네 발이 허공에서 앞뒤로 최대한 뻗어있는 점이 역동적이다. 말이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이후 우리 옛그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수렵도의 말 자세는 매우 독특하다. 한편, 말의 이런 자세는 서양화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엡솜에서 더비(Derby at Epsom)'가 있다.
제리코는 궁정 마굿간에서 말을 면밀히 연구한 화가로서, 이 그림에서 말의 자세를 수렵도처럼 그렸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네 발이 앞뒤로 뻗은 자세는 과학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즉, 사슴과 호랑이는 몰라도, 말은 전속력으로 달릴 때 네 발이 허공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라 모아진다. 사실, 오랫동안 말의 네 발이 모두 허공에 떠 있는지 한 발이라도 땅에 닿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논쟁거리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은 다리가 너무 빨라 맨눈으로 다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에 의해서 이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당시 카메라의 셔터 속도로는 말이 달리는 모습을 짧은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찍기 어려웠지만, 마이브리지는 셔터에 끈을 매달아 말이 달릴 때 건드리도록 했다. 이렇게 연속사진이 탄생하였다. 나중에 이 기술은 더 발전하여 영화를 찍는 영사기의 발명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렇다면 무용총 수렵도의 말 모습은 단순히 화가의 착시 또는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렵도의 화가는 말 달리는 모습의 역동성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이 빠르게 달리고 있는 모습을 정지해 있는 벽에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화가는 주어진 재료를 이용해 말이 달릴 때 느껴지는 역동성을 최대한 담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의 다리가 최대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자체는 과학적으로는 틀린 기술이지만, 역동성의 감상 역시 사실이므로 다른 관점에서 이를 착시나 거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는 정밀성에 집착하고 화가는 표현에 집착한다. 예술 작품은 누군가에게 감상되어야만 한다. 무용총 벽화를 그린 화가는 감상을 고민한 예술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관습이 되었다. 무용총 벽화의 웅대한 기상이 아쉬운 향수가 된 지 오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