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가 넘는 경기 양주시의 한 공공비축창고가 폐지로 가득 찼다. 정부가 쌀이나 과일 같은 농작물이 아닌 폐지를 공공비축창고에 고이 모셔 둔 이유가 뭘까. 폐기물이면서 동시에 원자재이기도 한 폐지가 경기침체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종이 박스를 못 구해 택배조차 못 보낼 정도로 ‘박스 대란’이 일었던 지난해와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환경공단이 관리하는 이 창고에는 4개 제지사와 5개 압축상(폐지 처리업체)에 적체된 폐지 1만 톤(t)이 비축될 예정이다. 대구와 안성에 이미 6,000t의 폐지가 나뉘어 보관 중인데 경기침체가 장기화할수록 물량은 더 늘어날 예정이다.
정부가 폐지를 폐기하는 대신 이렇게 특별 관리하는 것은 순환자원 특성상 원자재로서의 수요나 폐기물로서의 공급 중 어느 한쪽이 막히면 다른 한쪽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종이 수요가 감소해 제지사가 폐지를 사들이지 않으면 배출되는 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이 없고, 반대로 폐지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을 경우 종이 가격이 뛴다. 폐기물 처리는 하수도와 같이 도시를 유지하는 핵심 인프라이므로 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한 문제로 취급된다.
정부가 초과 공급된 폐기물을 비축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 당시 폐기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재활용품 수거 중단 사태까지 이어지자 정부가 나선 것이다. 폐지뿐 아니라 플라스틱, 비닐, 폐의류도 비축 대상이지만 유독 비축 빈도가 높은 것이 폐지다. 2018년 당시에는 다른 폐기물 없이 폐지만 2만8,200t, 중국이 폐기물 수입금지 정책을 발표한 2020년에는 전체 비축 물량의 60%인 2만1,248t의 폐지가 비축됐다.
폐지는 다른 순환자원에 비해 질량 대비 부피가 커서 적체가 발생할 경우 처리가 쉽지 않다. 더 넓은 저장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투입돼야 하기 때문이다. 폐지는 ①주택 및 회사 등 발생지에서 ②수거업체, 폐지를 수집하는 개인·고물상을 경유해 ③압축상으로 와 블록 단위로 압축된 뒤 ④제지사로 넘겨진다. 발생지와 경유지에서는 폐기물을 장기 보관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적체되는 물량은 고스란히 압축상과 제지상에 쌓이게 되는데, 여기서마저 보유한 저장 역량을 초과하면 순환 과정은 끊기고 만다.
현장에서는 이미 물량 포화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26일 서울 서초구의 한 압축상은 부지 내부의 차량 통행로는 물론, 인근 노상에까지 폐지를 가득 쌓아 두고 있었다. 업체 대표 A씨는 “이곳에만 1,500t의 폐지가 적체돼 있고, 별도로 임대한 임시 창고 물량까지 합하면 5,000t 가까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업체가 통상 처리하는 폐지는 일일 150t가량, 이미 수십일 치 물량이 처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올해는 과거 경험에 기반해 선제 조치를 취한 덕분에 아직 ‘수거 대란’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일시적인 가격변동(2018년)이나 특정 국가의 수출길이 막힌(2020년) 정도를 넘어서, 경기침체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두 사례 대비 폐지 가격은 오히려 올랐지만 물량을 소화할 수요 자체가 사라졌다. 올해 폐지 대란이 본격화된 8월 폐골판지(OCC) 수출량은 1만1,600t으로 전월 대비 53% 수준으로 급감했다.
업계 관계자 B씨는 “경기침체가 원인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 더 막막하다”고 푸념하면서도 “시민들이 종이를 버릴 때 박스(폐골판지)와 일반 종이를 제대로 분류해서 버려준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폐골판지를 제외한 지류는 오히려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 종이가 폐지(폐골판지)에 섞여 들어갈 경우 충분히 쓸 수 있는 자원을 적체 물량으로 낭비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