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7일 10년 만에 승진하면서 그가 그리는 '뉴 삼성' 밑그림이 본격적으로 구체화할 전망이다. 전자 산업에 뛰어들면서 삼성전자의 기틀을 만든 이병철 회장, 반도체와 스마트폰 사업을 세계 1위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의 자리를 이어 받은 이 회장은 자신만의 업적을 세우기 위해 과감한 투자와 속도감 있는 결단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그의 행보 앞에는 여러 가지 과제와 리스크가 남아 있다. 미·중 갈등의 심화, 글로벌 인플레이션 위기와 같은 대외 변수와 함께 책임 경영을 위한 조직 구조 개편, 남아 있는 사법 리스크 속에서 이 회장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이 모인다.
우선 삼성전자 실적을 책임져 온 반도체 경기는 본격적으로 하락 사이클에 들어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수혜 덕분에 치솟았던 반도체 수요는 경기 침체 여파로 크게 줄어든 상태다. 게다가 미·중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두 나라 모두에서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는 삼성전자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무엇보다 이 회장에게는 '제2의 메모리 반도체 신화'를 재현해야 한다는 숙제도 있다. 이에 이 회장은 2019년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 발표를 통해 반도체 위탁사업(파운드리)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해 6월에는 세계 최초로 3나노(1㎚는 10억 분의 1m) 공정 양산에 돌입했지만 아직까지 시장 점유율 1위인 대만의 TSMC와 격차를 좁히는 일이 만만치 않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위기마다 그랬듯 다시 한번 '기술 초격차'로 위기를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미 5월 이 회장은 앞으로 5년 동안 총 450조 원을 투자하고 8만 명을 신규 채용하는 투자·고용 계획을 내놓았다. 지난 5년 동안 투자한 330조 원보다 120조 원이나 많은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중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 유지와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300조 원을 쏟아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는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2'에서 2027년까지 TSMC보다 먼저 1.4나노 공정을 도입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이 회장이 정식 취임함에 따라 대형 인수합병(M&A)에 대한 결정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대규모 M&A는 이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불거지기 전인 2016년 11월 미국 자동차 전장 업체 하만을 80억 달러(약 11조 원)에 인수한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올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보유액은 126조 원으로, 이 회장의 재가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주요 글로벌 기업을 인수할 여력은 충분하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삼성은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AI) 등 분야에서 기술 격차를 짧은 시간에 좁히기 위해 전략적 M&A 기회를 살피고 있다.
이 회장 중심의 경영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편도 뒤따라야 한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이 회장 등 오너일가→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진다. 삼성물산 최대 주주인 이 회장(17.97%)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삼성물산 지분 31.31%를 보유 중이다. 이를 가지고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다. 삼성전자에 대한 이 회장의 지분은 1.63%다.
여기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입법 추진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총 자산의 3%까지만 가질 수 있다. 20조 원이 넘는 나머지 지분은 모두 내다 팔아야 한다. 이럴 경우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을 고리로 한 지배구조가 약해져 이 회장의 장악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2020년 5월 '4세 경영 포기'를 선언한 만큼 기존의 오너 체제의 지배구조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도 진행해야 한다.
과거 미래전략실(미전실) 형태의 그룹 내 컨트롤 타워가 되살아날지도 관심이다. 삼성은 박근혜 정부 시절 미전실이 국정농단 사건의 연결 고리로 지목되자 2017년 3월 전격 해체했다. 이후 계열사 사이의 협력을 위해 삼성전자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지만, 그룹의 중장기 전력을 짜는 데 힘에 부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책임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이 회장이 등기 이사가 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처럼 비등기 임원으로 회장직을 지속할 경우 회사에 대한 실질적 의사 결정을 하면서 책임은 회피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도 여전히 남아 있다. 광복절 특사로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해서는 복권 조치가 이뤄졌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 재판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는 회장에 취임한 이날 오전에도 법원에 출석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이 금리를 추가적으로 올릴 경우 내년까지도 세계 경기 침체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업 입장에선 총수가 리더십을 갖고 위기를 돌파하는 책임 경영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아버지 고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했던 것처럼 이재용 회장이 삼성의 새로운 변화나 혁신을 이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아직 회사와 관련된 재판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 회장의 승진이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을 통해 "이재용 회장이 자신의 불법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삼성전자의 회장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공정과 상식에 반하는 일"이라며 "진정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신에 대한 법률상 위험이 모두 해소된 후에 경영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