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비디오 캠코더… 세기말 추억이 화면에 ‘방울방울’

입력
2022.10.29 10:00
19면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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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7942. 난수표 같은 숫자 모음이다. 지난 세기말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알 만한 기호다. ‘영원히 친구 사이’를 의미한다. 숫자로 마음을 전달하던 무선호출기(삐삐) 시대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012는 좀 더 친숙한 숫자다. 삐삐 회사를 나타내던 앞 번호다. 이 숫자는 자연스레 공중전화 부스 등장으로 이어진다. ‘20세기 소녀’는 추억의 숫자와 기기들을 화면으로 소환한다. 풋풋한 사랑을 그리며 낭만을 자극한다.

①비디오 보고 삐삐 하던 그 시절

막 고교에 입학한 소녀 보라(김유정)가 주인공이다. 태권도 유단자로 활동적인 보라는 입학과 동시에 ‘특수임무’를 맡는다. 둘도 없는 친구 연두(노윤서)가 찍어둔 신비로운 남자 현진의 모든 걸 파악해야 한다. 연두는 심장수술을 위해 미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보라는 아픈 친구를 위해 현진(박정우)에게 밀착 접근하다 보니 그의 절친한 친구 운호(변우석)와 가까워진다. 셋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보라는 현진을 밀쳐내고, 운호와 달콤한 사이가 된다. 과연 둘의 첫사랑은 아무런 장애 없이 이뤄질 수 있을까.

②섬세하게 표현된 통속의 힘

영화나 드라마 속 청춘의 사랑은 대체로 상투적이다. 싱그러운 나이에 만나 청순한 감정을 나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사랑은 깨진다. 가슴 아린 사연은 성인이 되어서도 긴 그림자를 남긴다. ‘20세기 소녀’ 역시 이런 첫사랑 이야기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을 휘젓는 힘이 있다. 보라의 저돌적인 순수함, 운호의 차분하고도 따스한 말과 행동이 아스라한 감정을 불러낸다. 청춘의 두근거리는 사랑을 시청각적으로 섬세히 묘사해내는 연출력이 낭만을 자아낸다. 통화가 연결되며 공중전화기에서 떨어지는 동전 소리와 동전 숫자의 변화가 사랑의 설렘을 포착해내는 식이다. 비디오 화면의 거친 입자, 동네 비디오 가게 등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넘어오던 시절의 모습들을 인물의 감정표현에 적절히 활용해내기도 한다.


③우리 모두 그때를 통과했기에

‘20세기 소녀’는 아마 마흔 언저리 관객이 가장 좋아할 듯하다. 그들이 고교시절을 보냈던 20세기 말의 풍광과 정서를 화면에 오롯이 구현했으니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특정 세대의 마음만 자극하진 않을 듯하다. 10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듯한 기분이 들 테니까. 특히 대한민국에서 고교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보라가 경주 수학여행에서 친구들과 벌이는, 가슴 콩닥거릴 일들에 웃음 지을 듯하다.

성인이 된 보라(한효주)가 운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결말부는 뻔하면서도 눈물을 부른다. 유치함과 낭만은 종이 한 장 차이. 섬세함이 더해지면 통속의 힘이 얼마나 셀 수 있는지 영화는 스스로 웅변한다.

뷰+포인트
방우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김유정은 드라마 ‘일지매’와 ‘동이’에서 한효주 배역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20세기 소녀’는 두 사람이 한 인물을 연기한 세 번째 작품이다. 방 감독은 “김유정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성인으로 한효주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됐다”고 밝혔다. 한효주가 짧게나마 특별출연을 하게 된 이유다. 한동안 연기와 거리를 뒀던 이범수는 교사로 얼굴을 잠시 비춘다. 충청도 사투리를 천연덕스럽게 쓰면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미소를 불러낸다. ***한국일보 권장 지수: ★★★★(★ 5개 만점, ☆ 반 개)


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