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나연 "가장 행복했던 순간? US오픈 우승 아닌 LPGA 고별전"

입력
2022.10.25 16:06
23면

“지난 5년간 골프로 인한 행복감은 마이너스였지만 고별 무대에서 한번에 회복됐어요. 그 어느 날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달 초 은퇴를 선언한 최나연(35)은 자신의 골프 인생 중 최고의 순간으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고별 무대였던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을 꼽았다. 2016년 여름부터 깊은 슬럼프에 빠져 ‘꼴찌만 하지 말자’는 걱정이 앞섰지만 대회 후반 라운드에서 홀인원 등 쾌조의 샷 감각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최나연은 25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내 골프 인생 점수를 매기자면 고별전 전후로 나뉜다”며 “후하게 점수를 주는 편이 아닌데 고별전을 마친 지금은 100점이다. 그 전까지는 70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5~6년 동안 골프가 잘 안 돼 재기에 성공하는 모습으로 떠나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샷도 잘 되고, 홀인원도 나오고 능력 밖의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도와줬다”고 덧붙였다.

최종 라운드 마지막 홀부터 눈물을 감추지 못한 최나연은 현장을 찾은 팬들의 응원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는 “‘어느 곳으로 공이 날아가든 우리에게는 굿샷이다. 페어웨이를 걷는 모습을 보러 왔다’는 팬들의 응원에 ‘여기는 진짜 모두가 다 내 편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며 “덕분에 마음 편하게 쳤다”고 설명했다.

은퇴 순간 박수 받고 떠나는 걸 고대했던 최나연은 자신의 뜻을 이뤘다. 이 기쁨은 2012년 메이저대회 US오픈 우승 당시보다 더 컸다. 최나연은 “US오픈 우승은 메이저 우승 타이틀을 얻어 영광스럽고 명예로웠다면 고별전은 골프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비교했다.

최나연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4년 11월 ADT캡스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프로 무대에 뛰어든 ‘천재 소녀’다. LPGA 투어는 2008년부터 뛰며 통산 9승을 수확했다. 2010년에는 LPGA 투어 상금, 평균 타수 1위를 차지했다. 국내외 프로 대회 우승은 15승이다. 하지만 LPGA 2015년 월마트 NW 아칸소 챔피언십 우승 이후 부상과 부진이 겹쳐 긴 시간 우승 갈증에 시달렸다

최나연은 “2016년 여름부터 골프가 잘 안 돼 정말 많이 힘들었다. 슬럼프가 오기 전까지 드라이버는 때리기만 하면 그냥 멀리 가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골프가 쉬웠는데, 슬럼프 때 호되게 당했다”며 “한번은 말레이시아 대회를 마친 후 골프채를 다 부러뜨리고 난 다음 일본 대회에 가지 않고 혼자 홍콩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올해도 골프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고, 결국 은퇴 결정까지 이르게 됐다. 최나연은 “고별전 전까지 올해 컷 통과를 5, 6번 밖에 못했다”며 “연습 때는 잘 되다가도 대회만 나가면 다른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치는 것처럼 답답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LPGA 고별전을 잘 마친 현재 마음은 상당히 편해졌다. 덕분에 내달 11일부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SK쉴더스·SK텔레콤 챔피언십에서 치르는 공식 은퇴 경기도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제2의 인생도 구체화한다.

최나연은 “유튜브 방송 활동도 있지만 책을 먼저 내고 싶다”며 “나이가 더 들면 청춘을 바친 LPGA 투어가 기억 안 날 것 같아 10대, 20대, 30대를 한 권의 책으로 돌아볼 수 있게끔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또 18년 간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기술뿐만 아니라 선수 멘탈까지 잡아주는 지도자로 후진 양성에도 힘쓸 계획이다.

골프채는 계속 잡는다. 최나연은 “선수 때만큼 연습은 못하겠지만 내 성격이 은퇴했다고 못 친다는 소리를 못 듣고 살 것 같다.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집 지하에 스크린골프처럼 연습 공간을 따로 만들려고 한다. 이날 아침까지도 비용이 얼마 들어가는지 검색하다가 왔다”며 웃었다.

김지섭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