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잎사귀 위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표고버섯은 조린 간장 특유의 윤기가 흘렀다. 주황과 노랑 파프리카에 담긴 하얀 두부는 무척이나 보드라워 보여 입맛을 돋웠다.
지난달 17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열린 '한국 미식주간 2022' 행사장에서 만난 반갑고도 익숙한 고국의 식재료. 설레는 마음으로 포크를 든 순간, 같은 테이블의 베트남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의 버섯은 원래 이런 색을 띠냐"라는 식생학적 질문부터 "나뭇잎이 가리키는 방향에 어떤 의미가 있냐"는 철학적 질문까지. 음식을 만든 '한국 사찰음식 명인' 정관 스님과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로 테이블의 시선은 온전히 기자에게 향했다.
△야채장떡과 감말랭이 무침 △'빡빡장' 나물 비빔밥 △샤인머스캣 콩피(과일을 시럽에 절인 음식·Confit)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질문 한 번에 음식 한 입. 그리고 그들의 표정엔 한국 식재료와 정관 스님에 대한 존중이 금세 가득 찼다.
마지막 디저트가 테이블을 떠나갈 무렵, 정관 스님이 베트남인들 앞에 섰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이내 그의 옆을 찾아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인생 최고의 한 끼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베트남의 최대 에너지공기업 대표도 중앙정부 고위 관료도,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한국 사찰음식을 처음 접한 감동의 총량은 같아 보였다.
실제로 한국 농림축산식품부·산림청이 주최하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관한 올해 한국 미식주간 행사는 역대급 인기를 끌었다. 이례적으로 VN익스프레스 등 유력 현지매체 61곳이 이번 행사를 보도했으며,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 메뉴를 판매한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은 그의 음식을 경험하려는 현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미식주간 행사를 기획·진행한 '네모파트너즈 베트남'의 김소연 이사는 "베트남 주요 대기업과 관공서, 주베트남 외국 공관이 경쟁적으로 행사 단체 참여를 신청해 예정된 점심·저녁 일정이 모두 매진됐다"며 "정관 스님 덕에 베트남 내 고급 한식 대중화의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의 열광적인 반응에 정관 스님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 2016년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 출연 이후 '글로벌 스타'가 된 그에게도 베트남의 환대는 특별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정관 스님은 올해만 △미국 △벨기에 △태국 등을 돌며 두 달여 동안 해외에서 한국 음식 소개 행사를 진행했다. 최근 그는 전 세계 요리계에 영감을 준 인물에게 수여되는 '아이콘 어워드 아시아 2022'의 수상자로도 선정, 한국 음식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정관 스님은 한국일보와의 현지 인터뷰에서 "나에겐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인 김장을 하기 위해 귀국하기 전 올해 마지막 일정으로 베트남을 선택했다"며 "(내가 거처하는) 백양사 천진암의 다문화 가정 불자 중 절반 이상이 베트남인인데, 양국 수교 30주년 해에 이렇게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관 스님은 한국음식에 대한 베트남의 관심을 '문화적 인연'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1997년 성지순례 행사로 베트남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타 동남아국과 달리 베트남도 한국과 같은 소승불교 문화권임을 처음 알게 됐다"며 "거기에 쌀에 기반한 식문화, 5일장과 같은 재래시장 활성화 등 양국은 참 닮은 부분이 많아 음식으로 가까워지기 수월한 것 같다"고 했다.
'자비심으로 타인에게 베풀며 살라'는 '보시'(布施)를 중시하는 정관 스님은 베트남에 큰 선물을 남기고 한국으로 향했다. 해외행사 중 처음으로 자신이 한국서 가져온 씨간장이 아닌, 베트남 간장으로 '시그니처 메뉴'인 표고버섯 조청 조림을 만들어 현지에 전파한 것이다.
정관 스님은 "베트남 간장은 특유의 고소함과 달짝지근함이 매력"이라며 "(레시피를 배운) 베트남 유명 셰프들이 너무 영광으로 생각해 나 역시 뿌듯한 마음을 안고 귀국한다"고 웃음 지었다.
베트남이 정관 스님에게 열광하는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대중화'라는 사회 현상으로 우선 설명이 가능하다. 9,800만 명 인구의 97%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베트남은 OTT 시장이 매년 58% 이상 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블루오션'이다. '셰프의 테이블' 시리즈 역시 현지에서 인기가 많은 콘텐츠 중 하나이다 보니, 정관 스님의 베트남 유명세는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국 농수산식품에 대한 베트남의 애정이 정관 스님에게 투영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급 상품으로 한국 식재료를 찾는 베트남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철 식재료만으로 음식을 만드는 정관 스님이 베트남을 방문해 이슈가 더 확장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K푸드'로 통칭하는 한식과 한국 식재료에 대한 베트남의 관심은 매우 높다. 9일 '베트남 내 글로벌 한류 트렌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베트남인 12.4%는 K푸드를 가장 먼저 꼽았다. 1위는 15%를 기록한 K팝이었으며, '오징어게임'으로 대표되는 K드라마(9.8%)는 K푸드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K푸드의 인기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올 9월 기준 대베트남 한국 농수산식품 수출량은 전년 대비 24% 상승한 6억5,900만 달러에 달한다. 같은 기간 한국의 전체 농수산식품 수출 증가율(11.4%)의 두 배가 넘는 가파른 상승세다. 대표적인 효자 품목은 전년 대비 108% 이상 수출량이 증가한 닭고기다. 닭고기는 K팝 뮤직비디오·드라마 등에 자주 노출돼 현지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식 치킨 요리에 주로 사용된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 중인 베트남은 이제 막 건강기능식품과 반려동물 시장이 형성된 나라다. 이를 일찍 포착한 aT 등 한국 농수산식품업계는 상품 고급화를 통한 시장 선점 전략을 진행,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실제로 인삼류는 전년 대비 73%, 반려동물 사료 식품은 50%가량 대베트남 수출이 늘었다.
고급화 전략은 과일 분야에서도 유효했다. 특히 한국산 딸기·배·포도는 현지의 각종 프리미엄 행사장에 기본으로 세팅되는 과일로 자리매김했다. 토양과 기후, 비닐하우스 보급 부족 등으로 딸기와 배·포도의 당도가 떨어지는 베트남의 현실을 정확히 공략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현재 aT는 이미 대성공을 거둔 샤인머스켓에 이어 '홍주 씨들리스 포도' 등 신품종을 통한 상품 다양화 전략을 진행 중이다.
이광성 aT 아세안지역본부 하노이지사 차장은 "한국 농수산식품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중국산 '짝퉁 배'가 한국산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아 베트남 공안과 협력해 우리 농산물 시장을 지키고 있다"며 "한국 농수산식품 수요가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확산되는 점을 감안, 타잉화·하이퐁 등 2선 도시에서 한국 상품에 대한 홍보와 판촉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