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또 다른 박준경'이 살고 있습니다"... 월계동 철거민의 호소

입력
2022.10.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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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동, 단독주택 재건축 손실보상 대책 첫 사례
"16년 전부터 살아야" 이주비 지급 기준 비현실적
보상률 7.5% 불과 "사업시행 인가 시점으로 늦춰야"

“갈 곳도 없는데 무조건 나가라고 등을 떠미네요.”

서울 노원구 월계동 ○○○-○○번지 일대. 이곳 단독주택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신모(64)씨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20일 찾은 그의 집 방바닥은 난방을 안 한 탓인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지간한 살림살이는 테이프로 꽁꽁 묶인 박스에 담겨 있었다. 휴대용 가스버너와 작은 냄비, 수저, 침낭이 세간살이 전부였다. 그가 이삿짐을 싸 놓고 사는 건 강제철거가 임박해서다. 재건축을 앞둔 이 지역 거주자들에게는 7월 10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행정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신씨는 떠나지 못한다. 지금 가진 보증금으로는 서울에 구할 수 있는 집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철거반이 들이닥칠지 몰라 외출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06년 이전 거주 세입자만 주거이전 보상

공공 성격이 가미된 재개발과 달리 ‘단독주택 재건축’은 세입자를 위한 이주보상 규정이 따로 없다. 빈손으로 내몰리는 세입자 문제가 반복돼 온 이유다. 2018년 12월에는 마포구 아현2구역 세입자 박준경(당시 37)씨가 강제철거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자 서울시는 이듬해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단독주택재건축 세입자에게도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에서 정한 재개발 세입자에 준해 주거이전비 및 영업손실 보상비를 지급하고, 임대주택 입주 기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첫 사례가 바로 월계동이다. 하지만 시의 대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곳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박준경’들이 시름하고 있다.

독거노인 이모(73)씨는 2017년 월계동 재건축 지역 옥탑방으로 왔다. 그도 지난달까지 새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강제철거 두려움에 겨우 다른 옥탑방을 찾아 옮겼다. 손실보상 대상에서 제외돼 주거이전비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씨는 “휘발유까지 들고 저항했지만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며 “계약 때 아무런 설명도 안 해준 집주인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도정법은 지방자치단체가 재개발 구역 지정을 공람공고한 시점을 기준으로 3개월 이전 거주자만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월계동은 2006년 3월 공람공고가 났다. 벌써 16년이 지나 그사이에 이사 온 수백 명의 세입자는 보상 대상에서 빠졌다. 재건축 확정 후 이주ㆍ철거 시행까지 십수 년이 걸리는 현실을 법이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노원구청에 따르면 월계동 세입자 362명(주거 318명ㆍ상가 44명) 중 보상받은 이는 27명(주거 20명ㆍ상가 7명)으로 보상률이 7.5%에 불과하다. 단독주택 재건축 제도는 재개발에 비해 공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2010년 아예 폐지됐다. 그러나 이미 정비구역 지정을 받고 재건축을 앞둔 지역은 서울에만 38곳에 이른다. 제2, 제3의 월계동 사태가 당분간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갈 길 먼 세입자 보호 대책... "보상 대상 확대해야"

무엇보다 상당수 단독주택 재건축 세입자가 집값이 싼 곳을 찾아 둥지를 튼 ‘주거 빈곤층’이다. 강제철거로 쫓겨나도 다른 재건축 예정지로 옮기는 경우가 많아 평생을 집이 언제 헐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

때문에 손실보상 대상에서 빠진 취약계층에게 주거이전비를 지원하는 등 법과 현실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지자체의 보완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근본적으로는 세입자 보상 범위를 너무 까다롭게 규정한 도정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강훈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은 “영국, 독일 등 해외에선 토지 수용 시점에 거주하는 모든 세입자가 주거이전비 대상”이라며 “공람공고일이 아닌 사업시행인가 시점으로 보상 기준을 늦추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주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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