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넘어 역성장 공포 덮친 재계 "진짜 위기 이제부터...현금 비중 늘리자"

입력
2022.11.02 04:30
14면
<4>국가 경제, 저성장 수렁
3高 여파로 소비심리 급랭...재고 늘며 실적 추락
벌이보다 물가가 더 올라..."스태그플레이션 초입"
내년 전망 더 어두워...기업들 "긴축 경영 돌입"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는 글로벌 TV 시장의 '라이징 스타'(떠오르는 별)다. 액정표시장치(LCD)보다 선명한 화질을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3년 첫 출시 후 해마다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왔다. 지난해에도 700만 대 가까이 팔려 전년과 비교해 두 배가량 판매가 늘었고, 올해는 최소 800만 대는 너끈히 판매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연말로 갈수록 분위기가 차갑게 식고 있다. 최근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올해 OLED TV 출하량을 전년 대비 0.6% 감소한 667만 대로 내다봤다. 처음으로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역성장을 면치 못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 것이다.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는 회사는 LG전자다. OLED TV 시장 점유율 60%로 압도적 세계 1위인 LG전자는 TV 사업을 담당하는 HE(홈 엔터테인먼트) 사업 본부가 올해 3분기 554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LG전자 전체 매출액이 21조 원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 분기 매출을 기록한 것에 비추면 더욱 뼈아프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성장이 보장됐다고 믿었던 분야마저 휘청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내년에도 분위기 반전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내다봤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 현상이 한국 경제를 덮치고 있는 요즘, 기업들의 고민은 저성장을 넘어 역성장에 초점이 맞춰 있다. 인플레이션(고물가)과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로 수요가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데다 환율 상승 때문에 원자재 가격 부담까지 겹치며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어서다. OLED TV 시장의 부진 역시 3고 현상으로 소비 심리가 차갑게 식은 것이 원인이 됐다. 대기업들은 쌓이는 재고를 감당하지 못해 생산을 줄이고 고용·투자 규모까지 축소하는 분위기다. 중소기업들은 인력난과 전기요금 인상과 같은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한계 상황에 내몰리는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3高 파고에 '역성장' 현실화...한계기업 속출 우려도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 세 곳 이상이 실적 전망을 제시한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180곳의 올해 연간 매출 추정치는 약 2,474조 원, 영업이익 추정치는 206조 원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보다 매출은 19%, 영업 이익은 0.4%가량 많은 수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추정치가 계속 낮아지고 있어 지난해보다 이익이 감소하는 역성장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1.7% 하락한 10조8,000억 원에 그쳤다.

기업들은 경기침체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을 우려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분기마다 사상 최대 실적 기록을 경신해왔는데, 올 들어 원자재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이 맞물리며 소비 침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예상보다 판매가 부진하자 기업들이 생산을 줄이고 있지만 소비 침체 속도가 더 빠르다"며 "생산량 조정을 탄력적으로 하지 못하다 보니 '오버슈팅'(초과 생산)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처 팔지 못한 제품들은 고스라히 재고로 남아 창고에 쌓이고 있다. 대한상의가 한국평가데이터에 의뢰해 제조업체 상장기업(1,400여 개)을 대상으로 분석했더니, 대기업 재고 자산은 지난해 2분기 61조4,770억 원에서 올해 2분기 89조1,030억 원으로 45% 증가했다.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은 기본이고, 여기에 인력난과 전기요금 인상까지 겹친 탓이다. 30년 동안 자동차용 프레스 금형 제조, 설계 회사를 운영해 온 A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수주량이 30% 이상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는 "원자잿값 상승, 금리인상, 전기요금 인상 등까지 이겨내기 쉽지 않은 악재가 겹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일부에선 이미 국내 경제가 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뜻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초입 단계에 진입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5% 안팎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에 비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점점 올라가 5%대를 찍는 것이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이렇게 되면 코로나19로 인해 역성장을 기록한 2020년을 빼면 2011년 이후 처음으로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지르게 된다.



"내년 기점으로 경기불황 진입할 것" 전망도


문제는 내년(2023년) 전망은 더 어둡다는 점이다. 국내외 기관들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이미 1%대까지 내려앉았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3고 현상으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2023년을 기점으로 경기불황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 말쯤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만 그 뒤가 더 중요하다"며 "중소기업은 한계 기업이 절반에 달하고 있는데 위기 후에 바뀌는 산업 지형을 대비하지 못하면 뒤늦게 줄도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요 기업들은 이미 경영 계획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수립하며 긴축 경영에 돌입할 태세다. SK하이닉스는 규모가 큰 충북 청주 M17 반도체 공장 증설 계획을 보류했다. 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는 TV용 대형 디스플레이 신규 투자를 보류하기로 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채용 축소 기조를 밝힌 상태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상반기 TV 등 영상기기 가동률이 지난 10년 이래 가장 낮은 74.4%를 기록했다.

삼성·LG·SK 등 주요 그룹은 총수들이 직접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이끌면서 위기 대응을 위한 경영 전략과 중장기 목표를 가다듬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19~21일 주요 경영진 30여 명이 참석한 'CEO 세미나'에서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론하며 "경영 환경이 어렵지만 비즈니스 전환 등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찾으면서 위기 이후 맞게 될 더 큰 도약의 시간을 준비하자"고 당부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분간은 기업들이 현금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장기 계획을 끌고 갈 것"으로 내다봤다.


유환구 기자
김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