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은행이 딜레마에 빠졌다. 금리를 빠르게 올려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말리고 있는 와중에, 회사채시장에선 "돈줄이 너무 빨리 말라 기업 줄도산이 우려된다"며 한은에 유동성 공급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18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금융안정특별대출 재가동을 요청했다. 금융안정특별대출은 한은이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금융회사와 일반 기업에 우량 회사채(신용등급 AA- 이상)를 담보로 최장 6개월간 돈을 빌려주는 제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던 2020년 5월 4일 신설돼 지난해 2월 종료됐다.
나 회장이 긴급구조요청(SOS)까지 보낸 것은 유동성 공포가 일부 증권사·건설사의 부도설로 확산하며 투자심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회사채 이자는 21일 연중 최고치인 5.7%(3년물 AA-)를 돌파했다. 문제는 기업이 비용 부담을 안고 채권을 발행해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강원도가 레고랜드 빚 보증 의무 이행을 거부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관련기사: 공포에 질린 채권시장... '증권사·건설사 줄도산' 거짓 소문 난무)
한은이 금융안정특별대출로 긴급 수혈을 하면 불안감은 잠시 해소될 수 있겠지만, ①물가를 잡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1년 2개월 이상 지속하고 있는 금리 인상 기조와의 '엇박자'가 걱정이다. 물가 상승률은 아직 5%대의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앞서 영국중앙은행(BOE)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며, 긴급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와 유사하다. 영국 정부의 대규모 감세안 발표로 '파운드화 가치 역대 최저 수준으로 폭락→국채 가격 급락(이자 폭등)' 현상이 발생하자 BOE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약 102조 원 규모의 유동성을 임시 공급했다.
②금융안정특별대출의 명분이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현재 시장을 압박하는 주요 원인이 레고랜드 등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인데 대부분 서류상 회사(페이퍼컴퍼니)라 한은이 지원을 해도 고용 창출과 직접 관련이 없고, 부동산 버블의 원흉들이라 '도덕적 해이' 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봤다. 그는 "거시 정책(금리 인상)에서의 문제를 미시 정책(유동성 공급)으로 보완하는 차원이라 한은이 대출 지원에 나설 수는 있으나, 그에 상승하는 페널티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한은은 23일 정부와 "시장에 50조 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결과를 발표하며 금융안정특별대출 대신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공공기관채와 은행채를 포함하는 방안을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신속히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은행들이 한은에서 대출받을 때의 문턱을 낮추겠다는 의미다.
앞서 시장에서는 "적격담보 증권 확대는 한은이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한은의 부담이 덜하다"며 재개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다. 9월 말 이후 시중은행들이 역대 최대 규모 은행채 발행으로 자금을 흡수하며 회사채시장을 얼어붙게 만든다는 지적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