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에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인 채권시장이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여기에 강원도발(發) 레고랜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가 찬물을 끼얹으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급속한 자금 경색으로 기업들이 줄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강원도가 레고랜드 부동산 PF ABCP 보증 의무 이행을 거부하면서 단기자금 시장은 사실상 멈춰선 상태다. 국채나 다름없는 지방자치단체 보증 채권이 부도나자, 다른 PF 유동화증권은 아무리 높은 금리를 약속해도 투자자 유치가 어려워진 것이다. 강원도가 이날 다시 보증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입장을 공식 선회했지만 이미 채권시장은 차갑게 식은 상태다.
부동산 경기는 어렵고 수요도 줄었는데 물량은 잔뜩 남았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12월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PF 유동화증권 규모는 약 34조 원에 이른다.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증권사, 건설사들이 연쇄적으로 부실 위기에 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시한폭탄인 셈이다.
시장의 과도한 공포는 속칭 ‘지라시’ 형태로 왜곡돼 나타나기도 했다. 최근 금융권에선 '유동성 위기에 처한 일부 증권ㆍ캐피털사의 매각이 임박했고, 지방 건설사는 부도에 이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사명이 언급된 회사들은 즉각 부인하며 금융감독원 증권 불공정거래 신고센터에 신고하는 등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금감원은 한국거래소와 합동 루머 단속반을 가동한 데 이어 해당 종목과 관련한 주가 조작이나 공매도 세력 연계 가능성도 들여다보기로 했다.
기업의 주요 자금 조달 수단인 회사채 발행시장에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이날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전날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0.019%포인트 오른 연 4.35%에 거래를 마쳤다. 3년물 회사채(AA-) 금리는 연 5.588%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둘의 금리 차를 나타내는 신용 스프레드도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다. 그만큼 시장 참여자들이 회사채의 위험도를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이달 1~19일 회사채 발행 규모는 총 1조2,362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3.16% 급감했다.
기업 돈줄이 마르기 시작한 건 금리 인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부터다. 한국은행이 연속 빅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밟는 등 기준 금리가 오르면서 회사채 발행에 드는 비용 부담이 커졌다. 높은 금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자금을 조달하려 해도 위험을 피하려는 분위기 탓에 회사채 수요 자체가 바닥이다. 최고 신용등급(AAA)의 공사채마저 발행에 실패하는 경우까지 나온다. 한국전력공사가 지난 17일 연 5.75%, 5.9%의 고금리를 제시하며 4,000억 원 규모의 채권 발행을 시도했지만, 1,200억 원어치가 유찰된 게 대표적이다.
금융당국이 채권시장 안정펀드를 재가동하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금융투자협회가 예측한 3분기 공모 무보증회사채 수요 규모는 5조5,000억 원으로 지난해 3분기(9조 원) 대비 39%나 적다. 특히 신용등급 A등급 회사채의 수요예측 경쟁률이 지난해 364%에서 61%로 급락했다. 기업이 발행하려는 회사채가 다 팔릴 만큼의 수요가 없다는 의미로, 얼어붙은 투심과 기업 자금 경색 심화라는 중의적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시장에선 선제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경록 신영증권 연구원은 "채안펀드의 신속 가동, 은행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정상화 속도 조절 등 조치가 나오고 있지만 한 번 무너진 심리를 되돌리기 위해선 좀 더 강력한 추가 안정책이 나와야 한다"면서 “한국은행이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당시처럼 적격담보증권 범위의 전향적 확대 조치를 고려할 만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