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야구계의 심폐소생술사” “제주도 고교야구의 아버지” “울릉도가서도 야구팀 만들 사람”
야구인 성낙수(65) 감독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성낙수 감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주도'이다.
그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다. 하지만 자신은 제주도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다.
70년대 전국을 호령하던 경북고의 에이스로 봉황대기, 청룡기 우승을 이끌며 대회 최우수 투수상을 휩쓸고 경희대 진학 그리고 포항제철(실업)과 삼성에서 프로생활을 했다.
그 후 영남대에서 코치 생활과 모교인 성광중 야구부 감독을 12년간 역임하고 야구계를 떠나 대구에서 몽티기(생고기) 식당을 개업한 그는 사업 수완도 좋아 순조롭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다시 야구계로 돌아온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별 생각 없이 간 제주도 골프 여행에서 지인에게 들은 한마디였다. 창단 2년차 제주고 야구부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데 한번 맡아볼 생각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성 감독은 "이야기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몸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며 "그동안 애써 외면하며 모른척했던 야구DNA가 다시 삐쳐 나오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그는 야구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유니폼을 입게 된 제주도는 지금까지의 그가 접한 야구 환경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감독 부임 후 처음 접한 제주고 야구장, 물품 보관실, 감독실 암담한 현실과 직면했다.
야구장의 조명 시설은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훈련 시 선수들 부상을 막아주는 외야 안전 펜스와 그라운드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변변한 야구 용품, 그라운드 정비 도구 하나 갖춰져 있지 않았다.
쉽지 않겠구나가 솔직히 당시 심정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성 감독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감독실 정비였다. 유선방송, 인터넷을 모두 제거하고 간이침대를 요청했다. 감독 자신부터 아이들만 보고 야구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원이 절실했다. 하지만 성 감독이 제일 우선시 했던 것은 지원이 아닌, 관심. 도구와 물품이야 급한 대로 자신이 발로 뛰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관심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성 감독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팀, 제주인의 긍지를 높일 수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원보다는 관심이 우선이다"고 생각했다.
성 감독은 "감독 부임 첫날 마주했던 암담한 현실, 학교 관계자조차 제주도에서 야구가 되겠어요? 안타까운 듯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주위의 시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주도에서의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야간 연습은 해야겠고, 조명은 없고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민 끝에 선수들과 함께 라이트 시설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숲에서 나무통을 주어와 밑에 바퀴를 달고, 중심부에 조명을 달아, 나무통 상부에 도르래를 달아 조명으로 사용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학교 관계자도 보기 안쓰러웠는지 나중에는 라이트 시설을 해 주더라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당시 제주고 야구부가 약하다보니 제주도의 중학 야구 선수들은 육지의 야구팀을 찾아 섬을 떠나는 상황이었고, 자신은 육지로 나간 제주도 출신 선수들을 잡으러 육지로 나가는 코메디 같은 현실이 제주도 야구는 시작이었다.
혹자는 성 감독 자신에게 "제주도 아마야구의 아버지", "제주도 야구계의 히딩"라고 하지만 제주고 야구부가 성적과 다수의 프로 진출자를 배출하며 제주도에 야구 붐이 일어 날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주 교육청 장학사들의 관심과 도움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도 야구협회 박창선(64) 회장이 있어 가능했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박 창선 제주협회장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며 당시 제주야구협회도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야구를 제주도에 정착시키겠다는 박 회장의 노력과 아낌없는 배려와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이야기 했다.
성 감독에게 제주인은 감사한 존재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분들이라 했다.
제주도에 야구를 뿌리 내리기 위해 외롭고 힘든 싸움을 시작한 자신에게 제주도분들의 도움과 배려 관심이 없었다면 야구라는 씨앗을 제주도에서 싹을 틔울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행복순간 , 인생의 정점을 찍게 해준 분들이 제주인 이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보낸 13년의 기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 LG 트윈스 임지섭(27)선수라며 임 선수가 제주고로 전학을 올 때 임 선수 부모님께서 한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며 "우리아이 다쳐서 야구 안 해도 좋으니, 죽이든 살리든 감독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감독님께 우리 아이 맡기겠습니다."
당시 입스로 고생하던 임지섭 선수를 정상 궤도로 돌려 올려놓기 위해 육지에서 김시진(64), 양일환(61), 권영호(68),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레전드급 감독, 코치들을 제주도로 불러 임 선수의 완치와 성장을 이끌어내 LG 1차 지명 받게 한 일이라고 했다.
창단 3년째까지 전국대회 1승도 없던 제주고 야구부는, 그 해 봉항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 진출을 시작으로 메이저 대회 8강에서도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고교야구계의 다크호스 팀으로 성장했다.
"아마야구계의 심폐소생술사" 불리는 성낙수 감독에게 지난해 11월 경북 구미의 한 대학으로부터 SOS를 받게 된다.
대한민국을 직격한 저출산고령화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곳은 학원과 학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많은 학교들이 최근 운동부를 만들어 학생 수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창단된 구미대 야구부도 그중의 하나이다.
화려한 창단식 뒤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렇게 창단된 운동부를 본궤도에 올려 정착시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화려한 창단의 뒤편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야구인 성낙수는 구미대 야구부 감독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등판했다.
그는 부임 첫해인 2022 시즌 구미대 야구부를 이끌고 대학야구리그를 완주했으며, 감독 부임 10개월 만인 지난 9월 2023년 KBO 드래프트에서 프로 지명자를 배출했다.
KBO 드래프트 참가한 고교 졸업예정자 793명, 대학 졸업예정자 300명, 얼리 드래프트 신청자 55명, 트라이 아웃 참가자 13명. 총 1,165명 중 프로 진출할 수 있는 인원은 110명 9.4%.에 불과하다.(신고 선수 제외)
제주도에서 아마야구 신화를 쓴 성낙수 감독. 자신의 야구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야구 불모지 구미에서 자신의 제2의 야구 신화를 쓰고 있는 중이다.
성낙수 감독은 "야구에 미련이 있는 친구들, 아직 야구의 열정이 불타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서 , 자신의 야구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