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안' 역풍 책임지고 트러스 영국 총리 사임...'역대 최단기 총리' 오명

입력
2022.10.2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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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한 지 44일 만인 20일(현지시간) 사퇴했다. 트러스 총리가 취임 직후 추진한 대규모 감세안이 영국 화폐인 파운드 가치의 폭락 등 금융경제에 큰 혼란을 일으키자 책임을 진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는 이날 오후 1시 30분 런던의 총리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찰스3세 국왕에게 사임한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트러스 총리는 "선거 공약을 지킬 수 없어서 물러난다"며 "다음 주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에 머물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지난달 6일 취임한 트러스 총리는 영국 역사상 최단 재임기간 총리라는 오명으로 남게 됐다. 이전 기록은 19세기 초반 취임 119일 만에 사망한 조지 캐닝 총리다.

앞서 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23일 선거 공약인 최고 소득세율 인하와 법인세 인상 철회를 포함한 대규모 감세안을 내놓은 뒤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일으키면서 '좀비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지도력이 훼손됐다. 재원 마련이 불확실한 감세안에 영국 파운드화가 지난달 26일 한때 달러와 1대 1에 가까운 사상 최저 가치 수준으로 폭락하는 등 영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이에 트러스 정부는 지난 3일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 계획을 철회해 시장 불안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혼란은 지속됐고 취임 40일도 되지 않은 지난 14일엔 결국 자신의 최측근 각료였던 쿼지 콰텡 재무장관에 책임을 물어 경질하고 후임에 제러미 헌트 전 외교장관을 지명했다.

하지만 보수당 내에선 트러스 총리에 대한 사임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보수당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트러스를 신속히 퇴진시키려는 ‘구출 작전’을 논의하는 모임이 최근 일주일 내내 열린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보수당 대표 경선 때 트러스와 경쟁했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 지지자들은 전직 장관과 중진 의원 15~20명 정도를 당내 고위급 인사들의 모임인 ‘어른들의 저녁’에 초대해 트러스 퇴진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보수당 대표 경선에 참여했던 또 다른 의원인 페니 모돈트와 수낵이 손을 잡는 방안 등 구체안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트러스 총리가 재무장관에 새로 임명한 헌트 재무장관이 트러스 총리의 경제정책에 반기를 든 점도 악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헌트 장관은 지난 15일 낸 성명에서 “재원 없는 감세안을 담은 이른바 ‘미니 예산’으로 트러스 정부는 너무 멀리, 너무 빨리 갔다”고 비판했다. 트러스 총리는 감세안을 주장해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감세안이 계속 부정되면서 트러스의 국정 지도력과 신뢰도가 빠르게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트러스 총리는 이날 보수당 당대표 경선을 총괄하는 평의원협의회의 그레이엄 브래디 위원장과 면담한 뒤 “내주 안에 당대표 선거를 치르기로 브래디 위원장과 합의했다"고 말했다. 보수당 당대표 경선은 본래 2단계로 보수당 현역 하원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인기' 투표로 일정수 이상의 후보 추천을 받은 출마 의원들을 최종 2인으로 좁힌 뒤 한 달 이상의 일반당원 우편투표를 치러 최종 결정한다.

트러스 총리의 후임으론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다시 유력한 물망에 오른다. 온라인 설문조사업체 유고브는 이달 17, 18일 보수당원 5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트러스 총리의 후임으로 가장 선호하는 후임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2%가 존슨 전 총리를 꼽았고, 이어 수낵 전 재무장관(23%), 벤 월리스 국방장관(10%),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9%) 등이 뒤를 이었다.

김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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