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지배하던 이슬람의 마지막 통치자가 13세기 그라나다에 건설한 알람브라 궁전. 국내 한 드라마의 무대로도 소개된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물이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사자의 정원'을 둘러싼 건물의 일부는 금도금으로 장식되어 8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궁전의 찬란함을 과시해 왔다. 그런데 20세기 말 금 장식의 일부가 탁한 보라색으로 변하는 현상이 목격됐다.
대표적 귀금속인 금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부류에 속해 습기나 햇빛, 오염 등 일반적인 환경에서 매우 안정적일뿐더러 대부분의 산에도 녹지 않는다. 그래서 금은 과거로부터 장식품이나 화폐, 예술 작품 등 다양한 분야에 널리 활용되어 왔다. 고대인들에게 영원한 존재로 인식되었을 태양을 상징하던 금속도 금이었다.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꿈꾸며 알함브라 궁전을 금박으로 둘렀을 장인들의 염원을 무너뜨린 원인은 도대체 뭐였을까?
21세기에 이루어진 분석 기술의 혁혁한 발전은 수백 년에 걸쳐 변색된 궁전 유적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가능케 했다. 최근 그라나다 대학의 한 연구팀은 다양한 분광기가 결합된 전자현미경으로 변색된 부위의 금박을 조사한 후 변색의 원인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연구팀은 변색이 목격된 금박 부위의 균열과 빈틈에 주목했다. 그 틈을 통해 물이나 습기가 금박을 지지하던 주석 막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의 염분과 도시의 오염물질을 머금은 물과 주석의 반응물이 표면으로 올라와 금박을 덮자, 산소와 차단된 금의 화학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이 염분이 풍부한 환경 속에서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변색된 금박 부위에서 발견한 70나노미터 지름의 금 나노입자가 이 화학반응의 결과라 결론 내렸다. 무른 구리와 섞인 주석이 구리를 훨씬 더 단단한 청동으로 탈바꿈시키며 청동기시대를 열었지만, 얇은 금박을 받치던 알함브라 궁전의 주석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금의 화학적 분해를 이끌며 금의 변색에 기여해 온 셈이다.
물론 이 이론에 회의적인 과학자들도 있다. 해당 연구팀은 본연구가 수백 년간 자연적 조건하에서 화학적으로 변해 온 유적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역설했다. 자신들의 이론을 실험실에서 직접 검증하기 힘든 상황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본연구가 다양한 예술품과 건축에 사용되어 온 금박에 대한 처리나 보존 관련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화학적으로 안정한 금은 자연 광물에서 덩어리로 발견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금속들 중 하나다. 그러나 금도 변할 수 있음을 인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가령 4세기경 로마의 연금술사들은 질산과 염산을 섞은 왕수로 금을 녹여 자주색 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이를 이용해 색유리를 가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금은 나노입자로 변하면 왜 색이 달라지는가? 그건 바로 금 입자의 표면에서 빛과 반응하는 전자들의 움직임 때문이다. 전기적 속성을 가진 전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흔드는 빛에 반응해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빛의 특정 색깔을 흡수할 수 있다. 게다가 흡수되는 빛의 색깔은 나노입자의 크기와 형태에 의존한다. 알람브라의 궁전에서 발견된 금 나노입자는 빛에 반응해 녹색과 노란 빛을 흡수하며 자주색을 내는 데 알맞은 크기를 띠고 있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는 골칫거리로 확인된 금 입자지만 이 물질은 현대의 광기술 분야에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나노소재다. 금속의 나노입자가 빛과 반응하는 방식을 이용해 특정 색의 빛을 구현하는 발광 재료로 쓰기도 하고 광센서의 감도나 이미징 장치의 해상도를 올리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천태만상의 물질들은 모두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 백해무익한 물질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