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 동남부 네이장(内江)에 가면 ‘입체사서(立體史書)’라는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별명도 잘 지으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서 있는 역사책’이라는 의미로 룽창(隆昌)에 위치한 패방군(牌坊群)을 일컫는다. 패방은 어떤 인물의 공로를 기리거나 과거 급제, 충성과 효도, 절개와 의리를 자랑하기 위해 짓는다. 마을의 자랑이고 인물에 대한 평가다. 역사에 대한 기록이고 건축 문화다. 철학과 수학, 문학과 미학을 새긴다. 톨게이트도 고풍스럽다.
룽창에는 소금 장수들이 빈번하던 역참이 있었다. 당나라 시대부터 육로지충(六路之衝)인 교통 요지였다. 1,3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다. 13세기에 처음 패방을 세웠고 69개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지금은 17개가 남았는데 대부분 청나라 시대 건축물이다. 그저 한두 개가 보통인데 여러 개가 한꺼번에 보존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안후이 황산 부근에 7개의 패방이 나란히 보존된 탕위에촌(棠樾村)이 있다. 룽창과 쌍벽을 이루는 패방군이다. 서로 1,500㎞ 떨어졌어도 자연스레 비교하게 된다.
룽창 패방군은 남관에 6개, 북관에 7개가 남았고 외곽에 4개가 흩어져 있다. 남관인 춘우평(春牛坪)으로 간다. 소금 무역을 하던 흔적을 보여주는 염상태대(鹽商馱隊) 조각상이 있다. 소금을 싣고 가는 마바리꾼이다. 옛 무역로이던 길을 따라 패방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문화거리다. 들판에 자리 잡은 탕위에 패방이 쓸쓸한 데 반해 이곳 패방은 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양새다.
처음 만난 패방은 각라국환덕정방(覺羅國歡德政坊)이다. 만주족 성씨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와 관련돼 있다. 1870년 동치제 시대에 국환이 관리로 파견됐다. 역사상 룽창에 부임한 유일한 만주족 출신이다. 이듬해 이임할 때 주민들의 성원으로 세웠다. 높이 12m, 너비 6.7m 규모로 사주삼문(四柱三門)이며 삼층 처마에 다섯 개의 기와로 꾸몄다.
중앙에 덕정(德政)이라 쓴 글씨가 보인다. 그 아래는 선자혜화(宣慈惠和)다. 한마디로 평가한 문장이니 성품이 짐작된다. 한 칸 아래 양쪽에도 덕담이 있다. 왼쪽에 있는 자군(慈君)은 이해가 쉽다. 오른쪽에는 신부(神父)가 있다. 천주교와는 상관이 없다.
국환이 부임한 후 반년 넘게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용왕묘에서 돼지, 소, 양을 희생 삼아 기우제를 지냈다. 물을 관장하는 용왕에게 10여 일이나 빌었으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곡식은 바닥을 드러냈고 모두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무관 출신답게 성질이 불 같아서 화를 참지 못했다. 화승총으로 용이 산다는 용동(龍洞)을 풍비박산 냈다. 그러고 나니 거짓말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용왕도 놀라게 했다고 모두 환호했다. 기근에서 벗어나게 됐다. 누군가 국환을 가리켜 ‘진정 신과 같다’고 소리쳤다. 이때부터 ‘신부’라 불렀다.
꼭대기로 시선을 올린다. 두 개의 치미 사이 찰첨(刹尖) 부분에 원숭이가 등장한다. 양손으로 관인을 들고 오줌 누는 자세로 서 있다. 원숭이인 후(猴)와 고관대작을 일컫는 후작(侯爵)의 후는 발음이 같다. 높은 관직에 오르라는 희망을 반영했다.
패방은 앞뒤 한 쌍으로 제작된다. 뒤에도 원숭이가 있어 두 마리가 등을 맞대고 있다. 유일무이한 조각이라 ‘원숭이 패방’이라 부른다. 뒷면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넘쳤다는 민열무강(民悅無疆)이 새겨져 있다. 애민(愛民)과 절용(節用)도 있다.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 관리에 대한 역사 기록이다.
기둥 사이로 이길수덕정방(李吉壽德政坊)이 보인다. 1855년에 지었다. 함풍제 시대 관리를 역임한 이길수의 공덕을 기렸다. 홍수전이 주도한 태평천국 민란이 17개 성을 장악하고 난징에 도읍을 차린 시대였다. 이 틈에 비적이 난동을 부리고 백성을 해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길수는 마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우병어농(寓兵於農) 정책을 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했다. 민심을 안정시킨 모범 사례였으며 황제의 성지를 받아 세웠다. 백성을 통솔하는 심지가 매우 굳건하다는 공륵금석(功勒金石)이 새겨져 있다. 유교 경전을 주로 인용한 탕위에 패방과 달리 색다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서에 기록되는 공훈 문구 같아 마음에 든다.
패방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데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기록한 절효총방(節孝總坊) 두 개가 연이어 나온다. 절개와 효성을 찬양하기 위해 지었다. 건조하게 일(一)과 이(二)로 구분하는데 시기와 내용이 다르다.
1878년 광서제 시대 패방이 먼저 나온다. 중앙과 양쪽 기둥의 현판에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뒷면까지 합쳐 164명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재혼하지 않고 부모를 공양한 효부, 효성이 지극한 효자다. 남녀가 함께 기록돼 남녀동방(男女同坊)이라 부른다. 봉건시대의 종말이 가까운 청나라 말기였다 해도 남녀가 유별한데 희한한 일이었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희귀한 유적이다.
절효총방이 또 있다. 편의상 다인패방(多人牌坊)이라 부른다. 1855년 함풍제 시대 188명의 효부를 찬양했다. 앞면에 96명, 뒷면에 92명을 적었다. 수절과 공양, 양육의 삶이다. 표지판에 선량하고 소박하며 고생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남존여비 시대의 덕목이라고 한다.
현판에는 모모모지처모씨(某某某之妻某氏)처럼 빼곡하게 나열돼 있다. 절개와 효성에 어울린다는 문양이 빈틈없이 조각돼 있다. 투조(透雕)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둥 사이 현판을 받치는 까치발을 수선화 문양으로 장식했다. 신화에서 능파선자(凌波仙子)라는 미명으로 불린다. 얼음처럼 정숙하고 구슬처럼 순결한 여인에 대한 비유다. 오랜 세월 여성의 삶을 옥죈 가치관이다. 까치발을 딛고 올라가 부숴버리고 싶다.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다’는 세상난봉(世上難逢)이 보인다. 1880년 광서제 시대 만들어진 서승식백세방(舒承湜百歲坊)이다. ‘백세시대’라는 요즘도 쉽지 않은 일이 당시에 일어났다. 평균 수명이 40대이던 시대에 경사가 났으니 쓰촨을 총괄하던 관리가 기념사를 보냈다. ‘공자님 말씀’ 대신에 담백하게 축하했다. 100세까지 사는 일이 경전에 나올 일은 아니니 말이다. 친근한 모양은 또 있다. 꼭대기 찰첨에 있는 노인이다. 구름 문양을 밟고 복숭아와 지팡이를 들었으니 영락없이 수성(壽星)이다. 신화에 등장하며 장수를 관장하는 도교 신이다.
맨 끝에 위치한 패방에 이른다. 1887년 광서제 시대 황제의 뜻을 받들어 세운 곽옥란공덕방(郭玉巒功德坊)이다. 명망가 집안 후손으로 평생 선행을 베풀고 살았다. 84세에 이르자 관리가 조정에 공덕을 찬양해달라고 했다. 황제가 친필을 하사했다. 앞뒤 모두 낙선호시(樂善好施)라 새겼다. 자세히 보니 착할 선(善) 한자의 가운데 점 두 개가 없다. 선행이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라는 뜻으로 해몽하고 있다. 상인과 마바리꾼이 지나던 길이다. 황제가 하사한 메시지를 들었을 터인데 공감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네이장에 가면 꼭 방문하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오백 년에 한 명 나올만한’ 20세기 최고의 화가 장다첸(張大千)의 고향이다. 산수화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둔황 막고굴 벽화를 그대로 옮겨 그린 화가라 존경하는 인물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타강(沱江) 강변에 위치한 출생지에 기념관이 있다.
장다첸은 1899년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화가의 삶을 살았다. 원래 이름은 정권(正權)이다. 혼례는 치르지 않았으나 동거하던 아내가 사망하자 출가를 했다. 그때 법명이 대천(大千)이었고 환속 후에도 사용했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천년 유적과 인연의 끈이 있었던 듯하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1920년대 이후 유명세를 떨치는 화가가 됐다. 생애 첫 전시회 며칠 만에 100폭의 그림을 모두 판매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던 1933년 일제가 노구교 만행을 일으켰다. 장다첸은 일본군을 모욕해 구금을 당한다. 1938년 베이징을 탈출해 쓰촨에 있는 도교 명산 청성산에 은거한다. 도교를 창시한 장릉이 기거한 산 중턱에서 몇 년을 살았다. 이때 천년 세월의 벽화를 그리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교 사당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다가 그의 고거를 만나 너무 반가웠다.
1941년 둔황으로 간다. 2년 7개월 동안 머물며 혼신으로 벽화 276점을 그린다. 화보집 출판과 전시회를 열어 어둠 속의 천년 벽화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오대 시대의 20호 석굴을 그릴 때 일이다. 벽화 오른쪽 아래 끄트머리가 떨어져 나간 모습을 발견한다. 다른 부분에 비해 윤곽이나 색채가 희미했다. 자세히 살피니 벽화 안에 또 벽화가 있었다. 보물 안에 이전 시대의 보물이 숨어있었다. 겉장을 다 그린 후 관계자와 상의해 뜯어냈다. 과연 휘황찬란한 당나라 시대 벽화가 드러났다. 속살을 다시 그렸다. 층층이 새긴 막고굴의 천년 역사를 완벽히 복원한 화가였다. 대표작인 ‘장강만리도(長江萬里圖)’를 비롯해 산수화와 불화도 많지만 석굴 벽화만큼 강렬한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1949년 마오쩌둥에게 ‘하화도(荷花圖)’를 증정한 후 장다첸은 홀연 대륙을 떠난다. 홍콩을 거쳐 아르헨티나, 브라질, 미국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 세계에 이름을 드높이며 화가로 명성을 쌓는다.
기념관에 1968년에 그린 ‘아이헌호(愛痕湖)’가 전시돼 있다. 물론 복제품이다. 진품은 미술 경매에서 약 200억 원에 팔렸다. 고흐의 작품보다 더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장다첸이 중국에만 있었다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화가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조국을 사랑한 화가는 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78년 타이베이로 이주해 여생을 마쳤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가 열렸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건국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와 관련한 결의’ 문건이 통과됐다. 1945년 마오쩌둥의 ‘1차 결의’에 이은 ‘2차 결의’라 부른다. 문화혁명의 폐해를 빠져나온 후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세운 덩샤오핑 시대의 출범이었다.
지난해 11월 열린 제19기 6중전회는 시진핑이 주도한 ‘3차 결의’를 채택했다. 40년 만의 변화다. 제20기 공산당 당대회가 16일 개막해 22일 종료된다. 쓰촨 동부 광안(廣安)에 있는 덩샤오핑 고거를 찾아간다.
2007년 8월 마오쩌둥 고거를 찾은 적이 있다. 후난성 성도 창사에서 일일 투어에 참가했다. 시골길을 달려 2시간만에 사오산(韶山)에 이르렀다. 동행한 중국인들은 경건했다.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비판하고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했지만, 마오는 중국인에게 ‘영원한 지도자’였다. 출생지에 조성된 고거는 전형적인 농가였다. 존경 어린 눈으로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가슴을 적시는 지도자가 과연 있었나’ 자문했던 기억이 난다. 입장료는 무료고 촬영 금지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나름 가슴이 쿵쾅거리기도 했다.
덩샤오핑 고향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날씨였는데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초입에 있는 광장이 참배객들로 분주하다. 주최 측의 도움을 받아 헌화하고 사회자의 차례에 따라 고개를 숙인다. 바닥에 물기가 많아서 살짝 미끄럽지만 잔디와 나무는 오히려 싱그럽다. 의자에 앉은 모습이 키 작은 덩샤오핑을 잘 드러낸 자세다. 인자한 미소로 참배 온 인민의 마음을 골고루 어루만지는 듯하다.
오솔길을 걸어가면 진열관이 있다. 1904년 8월 출생한 덩샤오핑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엿볼 수 있다. 사숙에서 공부하고 공산당 가입과 항일 혁명투쟁, 건국 후 1952년 베이징으로 이주하던 시절로 이어진다. 문화혁명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개혁개방을 이끄는 지도자로 거듭난 인물이다. 1991년의 남방 시찰, 1997년 2월 향년 93세로 서거할 때까지 삶의 노정을 훑는다.
고거는 말끔하게 보존돼 있다. 쓰촨의 비밀결사 조직인 가로회(哥老會) 활동을 한 아버지 등소창(鄧紹昌)과 일찍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 담씨(淡氏)가 기거하던 방이 있다. 벽에 나란히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의 부친은 신해혁명 시기 혁명군에 적극 참여했다. 피는 속이기 힘든가 보다.
덩샤오핑이 어린 시절 지내던 방도 잘 꾸며져 있다. 다섯 살 많은 계모 샤보건(夏伯根)과 살던 방도 있다. 문화혁명 시기 고통을 함께 했고 모자의 정도 꽤 깊었다. 덩샤오핑이 사망했을 때 97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 아들아! 내 착한 아들아!’라며 통곡했다. 103세까지 장수했다.
바깥 바위에 장쩌민 전 주석의 필체가 보인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몇 가지 정권 안정을 위한 규정을 만든다. 젊은 정치인이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하는 정치교체와 파벌로 인한 권력투쟁의 폐해 방지를 지향했다. 67세는 남고 68세는 은퇴한다는 칠상팔하(七上八下), 세대를 넘어 권력을 교체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을 통한 3연임 금지 조항 등이다. 상하이방 장쩌민은 연임 후 공청단의 후진타오로 정권을 이양했다. 덩샤오핑이 정한 규정은 그의 사망과 함께 언제든 변경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2016년 티베트를 방문했을 때다. 라싸 기차역 앞에 자치구 성립 50주년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이 한 화면에 있는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22일 폐막하는 제20기 당대회에서 시진핑의 3연임이 기정사실화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시진핑은 1953년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국가지도자가 많이 거주하는 중난하이 근처다. 훗날 그의 고거도 볼 수 있을까? 권좌에서 물러난 후 ‘공덕 패방’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