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섬유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알베르토 파카넬리는 최근 청구된 7월분 전기요금에 깜짝 놀랐다. 전기료 고지서에 적힌 금액은 무려 66만 유로(9억2,000만 원)로 지난해 같은 달(9만 유로)과 비교해 무려 7배 넘게 올랐기 때문이다. 파카넬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며 “우리에게 남은 건 문을 닫는 일뿐”이라고 하소연했다.
유럽 패션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역내 섬유업체들이 글로벌 에너지 가격 급등에 낭떠러지로 내몰리고 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등 유럽산 고급 원단이 사라질 거라는 전망과 함께 130만 명에 달하는 유럽 섬유업계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8일(현지시간)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의류섬유산업연합회(EURATEX) 통계를 인용해 역내 섬유업체들의 생산 비용에서 에너지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에서 25%로 5배 급등했다고 밝혔다. 섬유산업은 원단 직조와 세탁, 건조 등을 위한 과정에서 전력 사용량이 높아 에너지 가격 상승은 업체의 손해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들 업체는 지금껏 값싼 러시아산 가스 가격에 의존해 중국 등 생산비가 저렴한 국가들과 경쟁하며 자라(ZARA)와 H&M 등 유명 유럽 패션브랜드는 물론 전 세계 고급 의류점들에 원단을 공급해왔다. 하지만 러시아산 가스공급이 중단되자 생산 단가가 크게 오르면서 경쟁력을 잃고, 생사기로에 몰리게 된 것이다.
더욱이 유럽 전력 공급업체들이 향후 예상 상승분을 반영한 전기료 두 달 치를 한꺼번에 선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 섬유업체들의 설 자리는 더 줄어들고 있다. 전력 공급업체들은 섬유업체들이 폭등한 전기료를 미납하거나 연체하는 비율이 늘어날 걸로 보이자 선제적 방어에 나선 셈이지만, 이는 가격 경쟁력을 잃어 매출이 급감한 섬유업체에는 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 중부도시 프라토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구이도 네스티는 “전기료가 지난해에 비해 10배가 올랐는데 두 달 치를 합산하면 정말 큰돈”이라며 “이를 미리 내라는 건 미친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라와 H&M 등은 전기료 인상분을 하청업체인 섬유업체에 떠넘기기 급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 섬유업체들이 전기료 인상분을 납품 가격에 반영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한 것이다.
오히려 이들 패션 브랜드 기업들은 올해 들어 생산원가가 낮은 튀르키예(터키)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로 원단 공급처를 지속적으로 옮기면서 섬유업체들을 더 곤란하게 하고 있다. 이탈리아 섬유업체들 사이에서 자라와 H&M에 납품하던 물량은 최근 5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의 에너지 수급문제는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재개되지 않을 경우 내년에 최악으로 치달은 후 2025년까지 계속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중소 규모의 영세한 유럽 섬유업체들이 이런 상황을 수년간 버틸 재정적 여력이 없다는 게 대다수의 분석이다.
이탈리아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파비오 레알리는 “지금같이 전기료가 치솟는 상황을 견디는 건 앞으로 2, 3달이 한계”라며 “몇 주 안에 공장 가동 중단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