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도 사랑은 피어난다'는 옛말이 있다. 선조들의 지혜는 2022년에도 적용되는 걸까. 'N포 세대(연애, 취업, 결혼을 포기한 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긴 지 몇년이 지난 지금. 역설적으로 청년들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열광하고 있다. TV채널이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마다 연애 소재 예능이 빠지는 곳이 없다.
연애와 결혼을 거부하는 동시에 남의 연애에 '과몰입'하는 독특한 현상. '4B(비혼·비출산·비연애·비성관계)'를 외치는 젊은 세대는 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문을 두드리면서 사랑에 대한 고민을 터놓는 걸까.
2016년 첫 책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 발행)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윤홍균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2020년 책 '사랑 수업'(심플라이프 발행)을 통해 '나'를 넘어서 '타인 모두'를 사랑하는 법을 일러준다. 사람들의 자존감을 다루면서 작은 결론 하나를 포착한 것이다. 바로 인생이 힘들다고 호소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과 지지를 받아본 경험이 없거나 적다는 사실.
자존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좌우하는 핵심은 바로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그는 책 '사랑 수업'에서 연인, 가족, 친구, 동료 등 모든 관계를 관통하는 사랑의 원리를 짚었다.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의원에서 윤 전문의를 만났다.
윤 전문의는 "과거에는 결혼을 하면 사회적으로 안정된 시스템에 들어가는 등 이득이 있었지만, 지금은 연애와 결혼으로 떠안을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상황"이라며 "집값과 생활비가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청년들은 사랑할 용기를 잃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할 용기가 부재한다고 해서 사랑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의 연애를 보면서 대신 사랑하고 대신 아파하는 것에 집중하는 겁니다."
윤 전문의는 사랑이 자존감의 근간인 만큼 '잘'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애착유형에서 말하는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의 차이는 긍정성"이라며 "내가 '안정 애착'이 되려면 나와 타인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후천적으로 '안정 애착'을 얻으려면 주변에 안정 애착형을 두고 그들의 사고와 언행을 배우는 게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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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 정신적 학대가 사회적 이슈로 올라오면서 사랑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가 '가스라이팅'이다. 윤 전문의는 "가스라이팅은 일종의 세뇌에 따른 행위로, 나라 간의 외교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며 "사랑은 독립국과 독립국 사이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가스라이팅은 식민지와 제국과 같다"고 말했다. 즉 스스로의 판단이 위축되고 상대가 주가 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얘기다.
그는 "가스라이팅은 관계의 고립부터 시작된다"며 "건강한 관계라면 타인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이건 우리끼리의 문제니까 남들이 관여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한다"고 지적했다. 이 점을 유념해서 내가 현재 피해 상황에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나에게 좋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윤 전문의는 "사람에겐 감정이라고 하는 표지판이 있다"며 "같이 있는데 뭔가 꺼림칙한 게 있다면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조언했다. "연애 상담을 하러 온 내담자들이 '상대가 이상하고 걱정된다'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본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의미하죠."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이별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헤어짐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헤어질 때도 최선을 다해 관계를 마무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윤 전문의의 판단이다. '잘 이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다.
요즘은 상대의 잠수 이별이나 환승 이별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그는 "이별할 때는 공사 과정이 필요하다"며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다리를 철거할 때 그 과정이 갑작스러우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별후유증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겐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자괴감에 드는 이들이 많은데, 원인을 찾기보다는 자기 비난을 멈추는 게 우선"이라며 "또 감정적 공감을 주변으로부터 받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면 그 다음은 이성적으로 복기하는 시간이다. 그는 "'사랑 오답노트'를 써보는 것을 추천한다"며 "어떤 게 문제였는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후에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지 등 객관적으로 돌아보면서 성숙해질 수 있다"고 전했다. 다만 오답을 보는 것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감정적 공감을 받는 게 우선이다.
사랑을 한다면 윗세대에게 '결혼은 안 하니?'라는 말을 들어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터. 결혼이 이제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지금, 윤 전문의에게 결혼을 추천하냐고 물어봤다. 그는 "결혼은 해외여행과 같다"며 "설렘도 있지만 귀찮기도 하고, 낯섦과 위험을 각오해야 하며,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결혼과 비혼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무엇이 나에게 맞는지를 잘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진료실에 찾아오는 비혼자들 중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윤 전문의는 전했다. 그는 "모든 모임이 가정 중심으로 돌아가니 자유와 동시에 외로움이 불시에 닥친 것"이라며 "혼자 여행하다 보면 외로울 때가 있는 것처럼 이 또한 본인에게 잘 맞는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