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집에 설치하고, 땅에 파묻고... 보이스피싱 '중계기' 숨기기 백태

입력
2022.10.18 14:44
경찰, 010 번호 조작 중계기 1만 대 적발

“엄마, 나 휴대폰 액정 깨졌어.”

50대 A씨는 최근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이런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그가 “아들 번호가 아닌데 누구세요”라고 묻자, 상대방은 “친구 전화로 문자 했어”라며 보험 처리를 위해 통신사 애플리케이션(앱)을 깔아달라고 했다.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신분증 사진 및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을 입력하고 앱을 설치했다. 사실은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를 위한 원격제어 앱이었다. 일당은 앱을 통해 A씨 계좌에서 수백 만원을 빼갔다.

외국서 걸려오는 ‘070’ 인터넷 전화를 중계기를 활용해 ‘010’ 휴대폰 번호로 바꾸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보이스피싱이 국제전화나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만 온다고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신종 수법이다. 올해 4~6월 경찰이 특별 단속을 벌여 적발한 불법 중계기만 9,679대에 달했다. 경찰 관계자는 18일 “사람들이 010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모르는 번호라도 받는다”면서 “경찰이 계속 철거하는 데도 사기 조직이 끊임없이 신종 수법을 만들어내며 중계기를 설치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실제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중계기를 숨기고 있다. 과거에는 원룸이나 모텔 등지에 다수의 유심칩을 장착한 뒤 고정형 ‘심박스’를 설치하는 방식을 주로 썼다. 하지만 최근에는 △산속 중턱이나 폐건물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후 중계기를 연결하거나 △야산 중턱이나 길가 수풀 속에 파묻는 등 은닉 장소가 다양해지고 있다. 또 △가방 안에 휴대폰 수십 대를 넣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인간 중계기’까지 등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국민 대부분이 보이스피싱에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10년 전보다 사기 수법이 훨씬 진화했다”며 “번호 바꾸기, 악성 앱 등 최첨단 통신기술이 동원돼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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