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수입차를 몰고 한강 전망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하고 억대 연봉을 받는 드라마 주인공. 전형적인 'K-드라마'의 재벌 2세 실장님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이 사람의 직업은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자금을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의 심사역이다. 스타트업 창업 과정을 그린 드라마 '스타트업'(2020년)에 등장하는 VC 수석팀장 한지평(김선호 분)은 귀신같은 투자 실력으로 명성을 쌓고 거액의 부까지 거머쥔 인물로 그려진다.
10년 차 회계사인 김지석(35·가명)씨도 '현실 속 한지평'을 꿈꾸고 있다. 대형 회계법인에서 경력을 쌓은 김 회계사는 스타트업에 뛰어들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비상장사)을 일궈보려는 꿈을 꾸었지만, 최근 벤처캐피털(VC) 심사역을 준비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 회계사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 VC와 심사역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심사역이란 직업을 접하게 됐다"면서 "그런데 스타트업을 유니콘까지 성장시키는 데 심사역의 역할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고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큰 기업의 재무 분석·관리 업무를 주로 해 왔던 김 회계사는 심사역이 되면 전도유망한 핀테크 기업을 발굴하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게임회사 개발자로 일하는 최영진(24·가명)씨도 심사역이 되고자 전직을 희망하고 있다. 최씨는 "창업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유니콘보다는 유니콘을 만드는 심사역이 내게 더 잘 맞을 거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스타트업과 VC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회계사 김씨나 개발자 최씨처럼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심사역으로 전직을 희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변호사나 의사들이 심사역을 희망하는 경우도 잇따른다.
이에 따라 예비 심사역을 양성하는, 이른바 '심사역 스쿨'에 사람들이 몰리는 중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1년에 네 차례 벤처캐피털리스트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2017년 이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 321명에 그쳤던 반면, 올해는 9월까지 이수자가 714명에 이르렀다. 자체적으로 심사역 스쿨을 운영해 될성부른 예비 심사역을 채용하는 곳도 있다. 액셀러레이터(AC·초기 투자와 보육을 겸하는 창업기획자)인 퓨처플레이는 올 8월부터 한국초기투자기관협회와 함께 심사역 스쿨 'VC 스프린트'를 운영했다.
스타트업 투자 활성화로 심사역 수요도 늘고 있어, 실제 VC 소속 심사역 인력 규모도 커졌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전자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심사역의 수는 2017년 8월 918명(119개 회사)에서 올해 8월에는 1,597명(229개 회사)으로 약 5년 새 73.9%나 늘어났다.
심사역은 어쩌다 전문직들마저 꿈꾸는 선망의 직업이 된 걸까. 쿠팡, 비바리버블리카(토스 운영사),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 운영사) 등 유니콘 기업이 연달아 등장하고, 초기에 이들을 발굴한 이들에게 큰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관심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유니콘 기업을 길러낸 대가로 단기간에 수백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거둬들이는 스타 심사역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6년 블록체인 및 핀테크 기업인 두나무에 투자한 것으로 유명한 김제욱 에이티넘 부사장은 올해 상반기 연봉과 성과급으로 262억8,500만 원을 받았다. 재벌 총수 중 상반기 가장 많은 급여를 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연봉(102억8,500만 원)보다 2배 이상 많다. 1984년생인 변준영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도 지난해 5억9,000만 원의 연봉과 상여금을 받아 화제가 됐다.
특히 5년 이상 투자 경력을 가진 베테랑 심사역들은 인력 시장에서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다. VC는 출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은 다음 7, 8년간 펀드를 운용해 투자를 회수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년에 걸쳐 진행되는 자금 모집→스타트업 발굴→투자 집행→투자 회수 단계를 전부 밟아본 심사역은 VC업계에서 '즉시전력'으로 꼽혀 몸값이 높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어느 하우스(VC를 지칭)든 가장 데려오고 싶은 심사역은 다른 하우스에서 펀드를 굴려본 심사역"이라며 "심사역에게 가장 중요한 스펙은 별도의 교육 없이 바로 펀드를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고 귀띔했다.
업계에선 거액의 성과보수가 일부 스타 심사역에게만 집중되고, 이를 좇아 심사역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진 현상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스타트업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지면서 자격에 미달하는 심사역도 함께 늘어났다고 본다"면서 "20, 30대 젊은 심사역들조차 투자를 받는 창업자들에게 '물주' 행세를 할 정도로 큰 권력을 쥐게 됐다"고 지적했다. 여러 번 투자 유치에 성공했던 스타트업의 한 임원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더 중시돼야 하는 가치는 창업을 통한 혁신"이라면서 "금융은 창업을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하는데, (지원 역할인) 심사역이 주목받는 현상은 되레 본말이 전도된 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