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미국 대체육 시장 진출을 선언한 신세계푸드는 최근 투자 규모를 계획보다 절반 정도 줄이기로 결정했다. 대체육 브랜드 '베러미트'를 미국에서 취급할 법인 베러푸즈 설립을 위해 7월 자본금 600만 달러(약 86억 원)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두 달여 만에 300만 달러(약 43억 원)로 바꿨다. 또 내년 상반기 투자 계획(400만 달러 증액)은 아예 접었다.
회사가 베러푸즈 설립·출자 결정을 할 당시에는 원·달러 환율이 1308.6원이었는데, 현재 1,400원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글로벌 거시 경제 변동성 증가로 초기 출자 규모를 바꿨다"고 설명했다.
경기 침체와 함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달러=1,400원 벽'이 무너지며 수출에 의존하는 국내 주요 기업들의 경영 계획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전 세계적으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며 유가, 원자재 등의 값을 끌어올리고 있어, 과거 환차익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던 행보와는 다르게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갑자기 투자를 중단한 기업은 신세계푸드뿐만이 아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 퀸크리크에 연산 11GWh(기가와트시) 규모의 원통형 배터리 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올해 초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고, 한화솔루션은 1,600억 원을 들여 지으려던 질산 유도품(DNT) 공장을 없던 일로 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충남 서산 대산공장에 3,600억 원을 투입해 원유정제설비(CDU)·감압증류기(VDU) 설비를 짓겠다는 계획을 중단하기로 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고환율 영향으로 계획보다 투자비가 늘어나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며 "앞으로 원자재 시장에 대한 예측마저 쉽지 않아 잠정적으로 투자 중단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유례없는 고환율은 항공기 구매로 외화 부채 규모가 크고, 항공기 리스비, 유류비 등을 달러로 지급하는 항공사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순외화 부채(반기보고서 기준)가 35억 달러(약 5조295억 원)에 달해 원·달러 환율 10원 상승 시 장부상 35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인수 합병이 진행 중인 아시아나항공은 3분기에만 무려 3,585억 원의 환 손실을 입어 자본 총계가 마이너스로 전환하는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 놓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고환율‧고유가 악재까지 겪으며 기초 체력이 약해졌다"며 "재무 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저비용항공사(LCC) 등을 중심으로 올해 안에 자본 잠식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걱정했다.
고환율 여파로 기업들은 연초 달성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던 영업이익마저 지키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환율이 올라 연초에는 실적 개선 효과를 누리기도 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한 데다, 원자재 가격, 물류비 등까지 함께 상승하고 있어 고환율이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 500대 기업 중 수출 제조업 재무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9월 조사에서, 환율 전망치(달러당 1,303원)가 기업들이 연초 사업 계획을 세울 때보다 89원 올라 영업이익이 평균 0.6% 악화한다고 나타났다. 연평균 기준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넘어선 것은 외환 위기가 발생한 1998년(1,395원) 이후 없었다. 전경련 측은 "현재는 이때 전망치보다 더 올라 수익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실제 한국일보가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 3곳 이상의 전망치가 나온 곳 대상·25일 기준)를 살펴본 결과, 1월 대비 영업이익 전망치가 내려간 상장사는 60곳(60%)에 달했다. 이 중 8곳이 적자전환(1곳 적자 확대)했다.
변동이 큰 주요 기업은 롯데케미칼·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적자전환), 이마트(-61.7), 아모레퍼시픽(-55.4%), LG화학(-28.4%), 금호석유(-27.3%), 포스코홀딩스(-22.4%) 등의 순으로, 제조 원가에서 원자재 비중이 높거나 달러 의존도가 큰 철강, 석유화학 등의 업종 위주로 수익성이 크게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롯데케미칼의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는 1조7,158억 원에서 10개월 만에 373억 원 손실을 볼 정도로 하락세가 뚜렷했다. 정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환율 상승으로 원료인 나프타 등에 대한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며 "여기에 미래 신산업 전환으로 대규모 해외 투자가 이뤄지다보니 외화 부채도 늘어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비싼 원자재를 써야 하는 모바일, TV, 가전 등을 생산하는 정보통신(IT) 업종도 사정은 비슷하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원재료 매입비(58조521억 원)가 전년 동기(46조6,039억 원)대비 24.6% 늘었고, LG전자 역시 같은 기간 원재료비가 17.7% 증가한 20조6,550억 원에 이르렀다. 업계 관계자는 "사업 구조상 매출이 수출국 현지 통화로 발생하고 있어 달러 강세는 지금으로서는 수익 구조 개선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며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에 따라 제품 수요마저 크게 줄고 있어 큰일"이라고 귀띔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출마저 주춤거리고 있다. 지난달 무역수지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6개월 연속 적자를 보인 것이다. 반도체(9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5.7% 감소)를 비롯, 석유화학(-15.1%), 일반기계(-1.5%), 철강(-21.1%), 디스플레이(-19.9%) 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감소세를 타 글로벌 경기가 본격 침체 국면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문제는 이런 고환율 여파가 짧은 시간에 좋아지기 어려운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경제학자 6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응답자 63%가 앞으로 12개월 안에 경기 침체가 온다고 답했는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12월(38%), 코로나19 확산 직전인 2020년 2월(26%)보다 높은 비율이다. WSJ은 "경기 침체 원인인 금리 인상 기조도 유지될 것으로 보여 경기에 부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대중국 수출이 4개월 연속 감소세를 타며 하강 국면에 들어간 상황에, 미국마저 소비 둔화가 가시화한다면 한국 기업들의 수출길은 사실상 막히게 된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최근 "무역수지 개선이 쉽지 않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보다 제품에 다양한 부품이 필요해 원자재 수입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하지만 수요까지 줄다 보니 제품 가격에는 모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당장 2, 3차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올 연말부터 수익 급감을 해결하기 위한 구조조정 등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국내 부품 공급망 단절 등 아래로부터 산업이 무너지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