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0일 만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대규모 감세 정책을 강행했다 철회한 후폭풍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트러스 총리가 꾸린 내각에서 그를 비판하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신뢰도, 권위도 바닥에 떨어졌다. 영국 정치권은 "시간 문제일 뿐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건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라고 냉소한다.
제러미 헌트 신임 재무부 장관은 15일(현지시간) BBC 등 영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트러스 총리의 결정엔 '실수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트러스 총리가 구원투수로 그를 임명한 지 하루 만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헌트 장관은 "(트러스 총리가) 부자들의 세금을 깎고자 했고 독립기구인 예산책임처(OBR)의 재정 전망도 없이 예산안을 발표했다"며 내용과 형식이 모두 틀렸다고 확인사살했다.
헌트 장관은 "세금은 일부 인상될 것이고, 정부 지출은 삭감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지출 삭감은 없다"는 트러스 총리의 발언을 뒤집으며 확실한 긴축 기조로 방향을 틀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재무부는 이달 31일 새로운 예산안을 발표한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도 트러스 총리를 봐주지 않았다. 앤드루 베일리 총재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행사 이후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8월보다 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해 긴축 정책이 필요하단 점을 재확인했다. 금융시장은 영국 기준금리가 연 2.25%에서 3% 또는 3.25%로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8월 금리는 0.5%포인트 인상됐다.
트러스 총리는 국경 밖에서도 공격받았다. 영국의 금융 정책에 말을 아끼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것(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이 실수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 등은 전했다.
'감세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건 9월 6일 보수당 대표에 선출되며 총리직에 오른 트러스 총리의 선거 구호였다. 부실한 정책을 들고나왔다가 스스로 철회한 리더십에 민심부터 등을 돌렸다. 14일 유고브의 여론조사에서 "트러스 총리가 사임해야 한다"는 의견은 59%였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19%에 그쳤다.
야당의 공세는 거칠어지고 있다. 제1야당인 노동당은 이르면 다음 주 의회에서 정부 불신임 투표를 제안할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왔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트러스 정부의 정책 발표와 철회를 "몇 주에 걸친 기괴한 혼돈"이라고 몰아세우며 조기 총선을 주장했다. 트러스 총리와 보수당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니 2024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겨 치르자는 것이다. 유고브의 11, 12일 조사에서 보수당 지지율은 23%로, 노동당(51%)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보수당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트러스 총리 반대파 의원을 중심으로 내각 불신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당대표 경선 없이 단일후보를 내세워 당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구체적 시나리오도 거론되고 있다. "트러스 교체는 시간 문제다", "이미 게임은 끝난 것 같다" 등 보수당 의원들의 발언이 가디언을 비롯한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다.
헌트 장관은 트러스 총리의 지난 경선 경쟁자였던 리시 수낙 전 재무부 장관을 지지했다. 그런 헌트 장관을 재무부 장관에 앉히며 사태 해결을 맡긴 것 자체가 트러스호의 난파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러스는 기록적으로 빨리 좀비가 됐다"고 평가했다. 더 타임스는 "핵심 공약(감세)이 폐기됐으므로 총리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