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업계에서 흔히 듣는 얘기 중 하나가 "학벌이 좋으면 투자받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반례도 있다. 화려한 학벌 없이 실력만으로 스타트업을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 원인 비상장사)으로 키워 낸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서울예대를 졸업한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대표, 전문대 출신의 이수진 야놀자 대표 등이다.
학벌이 좋으면 투자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스타트업의 속설, 어디까지 사실일까. 한번 검증해 봤다.
한국일보가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벤처캐피털(VC)로부터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한 182개의 스타트업 중 대표의 출신 대학(대학 미표기의 경우 대학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업 134개를 분석한 결과, 52.2%에 해당하는 70개 기업 대표가 서울대(22개), 카이스트(16개), 연세대(14개), 고려대(13개), 포항공대(5개)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이 대표인 기업은 38개로, 10명 중 3명이 두 대학 출신인 셈이다.
이 밖에도 대표가 하버드대 등 해외 대학을 졸업한 경우도 21개로 서울대 다음으로 많았으며, 의대 출신 창업자가 세운 기업도 3곳이 있었다. 지방대 출신 대표를 둔 스타트업은 134개 중 10개로, 분석 대상의 7%에 그쳤다.
이들 기업 중에는 아예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창업자가 고학력자임을 홍보하거나, 서울대나 카이스트 출신으로만 C레벨(CEO·CFO 등 주요 임원)을 꾸렸다고 명시한 회사도 있다. 서울대·카이스트뿐만 아니라 '과학고를 졸업했다'는 점을 내세우는 것도 차별화 전략 중 하나다.
물론 SKY나 카이스트, 포항공대에서 창업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투자 유치 비중이 높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한국 벤처 1세대로 불리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고(故) 김정주 전 넥슨 대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모두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이들의 성공 신화가 대학 후배들의 귀감이 됐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업계에선 스타트업에 돈을 대는 VC가 관행적으로 학벌을 우선해서 본 결과, 벤처 자본이 고학력 창업자에게 쏠리고 있다는 쓴소리가 적지 않다. VC가 직접 발로 뛰어 잠재력 있는 기업을 찾기보다, 학연 등을 이용한 '네트워크 투자'에 의존한다는 지적이다. 창업 구성원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인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VC로부터 시드(종잣돈) 투자를 받는데 서울대 인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면서 "투자유치(IR)-투자심의-실사-계약으로 이어지는 투자 절차도 형식적으로만 진행됐다"고 귀띔했다. 연세대 출신의 스타트업 대표도 "업계에서 고학력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는 확실하다"며 "대표와 VC 심사역이 같은 학교 동문인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투자 방식은 아이디어의 신선함과 혁신 가능성을 가장 우위에 두어야 할 벤처 투자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는 "아직까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VC의 윤리적 투자가 강조되는 분위기가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여태까지 스타트업 생태계에 세금을 이용한 공적 자금이 투입돼 성장해 온 것을 고려하면, VC들도 이제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 투자를 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