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17명을 숨지게 한 20대가 사형을 피하게 됐다. 총격범의 불우한 가정환경 등 정상 참작 여지가 있다는 배심원의 판단이 나오면서다. “정의를 뺏겼다”는 유가족들의 반발이 나온 가운데, 이번 결정이 사형제도를 점점 더 부정적으로 보는 미국 내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13일(현지시간) 미 CNN방송 등에 따르면, 플로리다주 순회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배심원단은 피고 니콜라스 크루즈(23)에 대한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를 재판부에 권고했다.
크루즈는 2018년 2월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시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등학교에서 반자동 소총으로 150여 발을 발사해 학생 14명과 교사 3명 등 17명을 살해하고, 17명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이 학교를 다니다 사건 발생 직전 교칙 위반으로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15명이 숨진 1999년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미국 역사상 학교에서 벌어진 최악의 총기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됐다. 크루즈는 지난해 10월 열린 재판에서 자신에게 적용된 각각 17건의 1급 살인 및 살인 미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이후 검찰은 범죄가 계획적이고 잔인하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이에 반해 크루즈의 변호인들은 피고 어머니가 임신 당시 술과 마약을 남용한 탓에 그가 신경발달 장애를 갖게 됐다고 주장해왔다. 또 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불우한 환경이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이날 배심원 12명이 7시간 넘게 머리를 맞댄 끝에 3명은 사형에 반대표를 던졌다. 피고 측 정상 참작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플로리다주 법은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사형을 권해야 판사가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다음달 1일 법원이 종신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커졌다.
유가족은 분노했다. 사건 당시 숨진 소녀 앨리샤 알하데프(당시 14세)의 부모는 “살인자에게 자비를 베푼 점이 역겹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지나 몬탈토(14)의 아버지는 “판결이 비현실적”이라며 “자녀를 죽인 괴물이 또 하루를 살게 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제이미 구텐베르크(14)의 아버지는 “이번 결정으로 또 다른 총기 난사 발생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꼬집었다.
이날 배심원의 결정이 사형제도에 대한 미국 내 인식 변화를 보여준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인들이 사형 제도에 대해 점점 더 경계하고 있는 시점에 나온 권고”라며 “1990년대에는 80%가 사형을 지지했지만 최근에는 비율이 54%까지 줄었다”고 전했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사형제도를 폐지한 주는 23곳에 달한다. 27개 주의 경우 여전히 제도가 유지되고는 있지만, 실제 집행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줄어드는 추세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2021년 미국 내 사형 집행은 11건으로, 1998년(98건)의 11% 수준으로 줄었다. 이날 재판이 진행된 플로리다 역시 사형제도가 남아있지만, 2019년 이후 3년간 집행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