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임성민(20)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 드라마가 손에 꼽는다. 가장 최근 본 콘텐츠는 넷플릭스의 '소년심판'. 그전은 2020년 '스위트홈'이 다다. 그래도 유명한 드라마의 줄거리는 거의 다 꿰고 있다. 유튜브 요약본으로 틈틈이 신작들을 챙겨보기 때문이다. 임씨는 "20, 30분이면 핵심 내용과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굳이 시간을 할애하면서 콘텐츠 전체를 소비할 필요를 못 느낀다"며 "매달 내는 이용료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TV라는 매체가 쇠락하면서 '본방 사수'라는 말이 무색해진 지도 오래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등장으로 그 빈자리는 '드라마 정주행', '몰아보기'라는 말이 차지했다. 그러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과 같은 뉴미디어 플랫폼의 급속한 성장은 이런 시청 행태조차 바꾸고 있다. 1분 내외의 짧고 임팩트 있는 영상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6부작인 '수리남', 12부작인 '작은 아씨들', 16부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길어도 너무 길다.
유명 유튜브 채널의 요약본 콘텐츠는 올리기 무섭게 수백만 조회수를 자랑한다. '지무비'의 SBS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 43분짜리 요약본은 올린 지 2주 만에 700만 뷰를 찍었다. 또 다른 채널 '고몽'의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7, 8회 요약본도 100만 뷰를 넘었다.
방송사와 OTT, 영화사도 이런 세태를 반영해, 요약본을 스포일러나 저작권 침해로 여기는 대신 홍보용으로 이용한다. 자사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직접 요약본을 만들기도 하고, 유명 유튜버에게 콘텐츠 사용 저작권을 풀어주는 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렵거나 배경 지식이 있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 중심으로 요약본 만드는 데 협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 기대와 달리 요약본을 보고 본방송으로 유입되기보다는 요약본만 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게 함정이다. 직장인 이모(24)씨도 '웨이브', '왓챠', '티빙', '넷플릭스', '쿠팡플레이'까지 OTT만 5개를 구독 중이지만 오히려 요약본을 더 즐겨 본다. 이씨는 "출퇴근 시간에 온전히 한 회를 보지 못하는데 방송 클립, 하이라이트 영상은 길이가 짧을뿐더러 해석까지 해준다"며 "최근 '굳이 전체 영상을 봐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일부 OTT를 구독 해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콘텐츠 유통사와 유튜브의 공생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대중음악도 2분대로 끊는 게 흥행 공식이 됐다. 13일 멜론차트의 1~3위에 올라 있는 지코의 '새삥'은 2분 27초,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는 2분 56초, 뉴진스의 '하입 보이'는 2분 56초다. 10년 전 인기 곡이었던 싸이 '강남스타일(3분 42초)'이나 씨스타 '나혼자(3분 26초)', 빅뱅 '판타스틱 베이비(3분 52초)'보다 1분 가까이 짧아졌다. 강타는 얼마 전 신보 발매 기념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H.O.T.가 데뷔한) 16년 전과 비교하면 곡들이 엄청 짧아졌다"며 "곡의 기승전결도 중요하지만 짧은 시간에 임팩트를 보여드릴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숏폼 콘텐츠'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인 10대, 20대가 원하는 짧은 콘텐츠 중심으로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재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싫어하는 매체 이용 행태가 익숙해졌고, 그것이 이제 내용까지 규정하고 있다"며 "요즘 세대는 기승전결이나 성장 과정 없이 만능 캐릭터가 툭 튀어나오는 스토리도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렇게 너무 단편적이고 말초적인 콘텐츠에만 익숙해지는게 리터러시 측면에서 바람직한지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이 문화 콘텐츠가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시대의 효율적인 소비 전략이란 시각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글로벌문화학부 교수는 '서사 총량의 법칙'에 비유하며 "긴 서사의 시대는 끝났다"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과거에는 책을 읽어도 삼국지, 토지 하나만 진득하게 읽었다면 지금은 웹툰, 웹소설 등 동시에 10개의 콘텐츠를 보고 있다"며 "길이의 문제라기보다 한 콘텐츠에 대한 몰입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