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식품 관련 상거래(커머스) 스타트업 A사는 올해 여름 후속 투자를 유치할 목적으로 우선주(보통주보다 우선적 지위가 인정되는 주식)를 발행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주식 발행 조건을 자세히 따져 보면, 미래에 A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작은 '불씨'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금난 해소를 위해 발행한 주식이 되레 회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도대체 우선주가 어떤 조건으로 발행되었기에, 투자가 오히려 회사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A사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한국 스타트업 투자의 대세가 된 주식인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알아야 한다. RCPS는 투자자들을 위한 특별한 권리를 주식에 잔뜩 붙인 우선주다. ①투자금을 채권처럼 상환받을 수 있고(Redeemable), ②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으며(Convertible), ③이익배당과 잔여재산 분배에서 다른 주주보다 우선권(Preference)이 부여된 주식(Share)을 말한다.
RCPS는 대체로 스타트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벤처캐피털(VC) 입장에서 유리하다. 반대로 돈을 받는 스타트업 쪽에선 화려한 옵션의 이름만 봐도 뭔가 불리한 조건이다. 여기 붙은 권리들이 모두 투자자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제 투자 과정을 보면 많은 스타트업이 A사의 경우처럼 RCPS를 통한 투자를 감수한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VC 신규 투자에서 RCPS를 포함한 우선주 형태로 투자된 비중은 72.4%에 달했고, 비중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협회는 우선주 대부분이 RCPS 투자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RCPS는 투자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모두 집어넣은 '풀옵션 우선주'이기에, 이것만 봐도 스타트업 생태계 주도권을 누가(VC) 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중요한 스타트업이라지만, 실제 투자에서 아이디어(창업자)가 돈(투자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일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스타트업 투자는 단발로 끝나지 않고 △시드 단계(종잣돈이 필요한 초기) △시리즈A→B→C 순으로 단계별 투자를 받기 때문에, 후속 투자를 위해선 VC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RCPS 신주 발행으로 시드 투자를 유치한 경험이 있는 한 스타트업 대표는 "계약 조건의 유불리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면서 "한 번이라도 투자를 받아야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름난 VC라면 좋든 나쁘든 가리지 말고 받자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RCPS는 투자자에게 얼마나 강력한 안전판을 제공하기에, 대부분 VC들이 RCPS 형태를 선호하는 것일까. RCPS 중 가장 중요한 옵션은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C'다. 투자자가 보유한 RCPS를 보통주로 전환할 때는 통상 보통주와 1:1 비율로 전환한다고 명시한다. 투자자가 특정 기업의 RCPS를 주당 1만4,000원에 샀다고 가정해 보자. 기업공개(IPO)를 앞둔 이 스타트업의 공모가가 2만 원으로 책정됐다면, 투자자는 1만4,000원짜리 주식 1주를 2만 원짜리 주식 1주, 즉 1:1 비율로 바꿀 수 있다. 전환권을 쓰면 주당 6,000원의 시세차익을 누리는 셈이다.
특히 기업가치가 떨어질 때 C(전환권)는 창업자에게 더 불리한 쪽으로 작용한다. 투자자는 손해를 막기 위해 '기업가치가 떨어지면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하는 비율을 투자자에게 유리하게 바꾼다'는 식의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한다. 만약 기업가치가 떨어져 공모가가 예상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이 조항에 따라 주식 전환 비율이 투자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되고, 투자자는 자신이 보유한 RCPS보다 더 많은 보통주를 챙겨 지분을 늘릴 수 있다. 이를 전환가액조정, 리픽싱(refixing)이라 부른다.
스타트업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기업 가치가 상승할 때는 창업자들이 RCPS가 내포한 이런 문제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VC 측에서 기업가치를 하향 평가하면서 리픽싱을 통해 지분을 늘리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스타트업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세움의 정호석 변호사는 "후속 투자를 유치하면서 리픽싱 조항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스타트업의 민원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최앤리 법률사무소의 최철민 변호사는 "스타트업이 당장 자금난부터 해소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독소조항에 가까운 리픽싱 조건도 거부하기 어렵다"면서 "이런 계약서는 오히려 차후에 있을 후속 투자 유치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리픽싱 조항에 제시된 성과 지표(매출액, 영업이익)를 달성하기 위해 무리한 양적 성장을 도모할 경우, 오히려 기업가치가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스타트업이 리픽싱 조항 때문에 무리한 매출 확대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재무구조 악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C만큼은 아니지만 R(상환권)이나 P(우선권)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투자금을 채권으로 받을 수 있는 상환권을 의미하는 R의 경우, 상법상 배당 가능 이익이 있을 때만 상환받을 수 있어, 초기에 적자를 많이 내는 대부분 스타트업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익배당 우선권을 의미하는 P 역시 적자 비율이 높은 초기 스타트업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 옵션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업 특성에 따라 바로 이익이 나는 스타트업도 소수 존재하는데, 이 경우 대출처럼 투자금과 이자를 더해 상환해야 할 의무가 생길 수 있다. 투자금인 줄 알았던 돈이 갑자기 부채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2019년 토스가 증권사를 만들었을 때 바로 R(상환권)이 문제가 됐다. 토스는 자본금의 75%를 RCPS로 조달했는데, 상환권을 부채로 판단한 금융당국이 "자본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고, RCPS에서 전환권을 없앤 전환우선주(CPS) 방식으로 투자가 다시 이뤄졌다.
VC가 각종 옵션을 걸며 스타트업에 불평등한 조건을 요구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최근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벤처자본의 본질은 모험에 있는데, 온갖 안전장치를 걸어둔 투자를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냐"며 "(이름만 모험자본이지)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과 다를 게 없다"고 꼬집었다. 법무법인 태림의 하정림 변호사는 "리픽싱 조항은 초기 스타트업의 열악한 지위를 이용해 회사 주식을 과도하게 낮은 가격에 가져가려고 하는 불공정한 행위라고 볼 여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VC업계는 '투자 유치가 필요한 스타트업'과 '위험요소를 줄이려 하는 VC'의 필요가 균형을 이룬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VC 심사역은 "VC는 스타트업에 투자해 투자금 100%를 잃을 수도 있다"면서 "투자 방식이 RCPS라는 이유만으로 VC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과도하다"고 반박했다. 또 다른 VC업계 관계자도 "리픽싱 조항을 매출에 연동하는 건 독소조항이라기보단 스타트업이 투자사에 자체적으로 제시한 목표일 수도 있다"면서 "리픽싱 조항은 기업 가치를 산정하기 어려운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치를 재조정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