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신뢰 감소.’
올해 8월 여성가족부 실태조사에서 스토킹이 미친 영향을 묻는 질문에 피해자 10명 중 6명(60.3%)이 꼽은 후유증이다. 또 피해자들은 우울증ㆍ불안감을 겪고 술과 담배에 의존(48.4%)하는가 하면, 새로운 폭력의 두려움(42.3%)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스토킹 피해자 A씨는 개명과 성형을 해도 공포심이 전혀 줄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는 13일 “가해자에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돕는 심리ㆍ정서적 지원이 절실한데, 제도적 뒷받침은 아직 더디기만 하다.
스토킹 피해자는 법무부 산하 스마일센터나 여가부가 위탁한 민간기관 둘 중 한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두 군데 모두 스토킹 피해자 전담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마일센터는 상근직 전문 상담사를 두고 있으나 이곳을 찾는 피해자와 가족 상당수는 폭력, 살인 등 강력범죄와 연관돼 있다. 지난해 스마일센터 ‘범죄 유형별 지원 현황’을 보면, 폭력(35%)과 성폭력(34.6%), 살인(11.2%) 비중이 80%를 넘은 반면 스토킹 범죄를 포함한 ‘기타’ 유형은 2.3%에 불과했다.
여가부 위탁 기관도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주로 다룬다. 지난해 4월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자 정부가 스토킹 피해자도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혔을 뿐이다. 위탁 기관에 입소해 심리 치료를 받는 스토킹 피해자가 적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여가부가 집계한 올 상반기 스토킹 상담 건수는 2,731건이었지만 기관 입소자는 7명이 전부였다.
정부와 국회도 갈수록 심각해지는 스토킹 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별도 지원 기관이 필요하다고 인지하고 있다. 4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여가부가 각각 발의한 ‘스토킹 피해자 보호 지원에 관한 법률’은 전담 기관을 설치해 피해자의 신체ㆍ정신적 치료 등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두 법안은 5개월 동안 표류하다가 지난달 14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이틀 후에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다. 국회는 두 법안을 병합 심사해 제정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다만 윤석열 정부가 여가부 폐지를 공언한 것이 변수가 될 수 있다. 주무 부처가 사라지면 법안 실행의 동력은 아무래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전문가들이 정부 대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대책보다 중요한 건 실행 의지”라고 꼬집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스토킹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고 정상적 삶을 지원하는 역할은 개인이 아닌 국가에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