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동의 전통적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와의 관계 재설정에 나섰다. 미국의 간곡한 부탁에도 석유수출국기구+(오펙 플러스)의 원유 감산을 주도해 사실상 러시아의 이익을 보전해 줬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무기 수출 중단부터 사우디 주둔 미 병력 철수까지 강경책을 쏟아내며 바이든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으로 틈이 생긴 미국과 사우디 관계가 이번 감산 결정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미 CNN방송 인터뷰에서 "사우디와 관계를 재고하겠다"며 "사우디가 러시아와 함께한 일에는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불과 3개월 전 국내 여론의 반대에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지목받는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만나 '주먹 인사'를 나눴던 것과 180도 뒤바뀐 기조다.
바이든의 강경한 태도는 사우디가 러시아와 손잡고 오펙+의 감산 결정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감산 결정 전 다양한 루트로 사우디에 "감산을 미뤄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사우디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증산 요청을 하기 위해 사우디까지 날아갔던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이번 감산으로 원유를 수출해 군비를 마련하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까지 흔들리게 되면서 의회에선 '사우디의 러시아 편들기'라는 격한 반응까지 나왔다.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인 딕 더빈 의원은 "사우디는 러시아가 우크라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분명히 원했다"며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미국에 대항하는 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사우디"라고 CNN에 말했다.
사우디와의 안보 협력을 끝낼 것을 요구하는 주장도 나왔다. 로버트 메넨데즈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사우디와의 모든 협력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으며, 민주당 의원들은 사우디에 무기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뿐 아니라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미 병력과 고고도대공방어시스템(사드) 등 방어시스템을 철수하는 법안도 발의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이번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다음 달 치러질 중간선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원유 감산으로 휘발유 가격이 상승하면 안 그래도 높아진 물가 상승률이 다시 뜀박질할 수 있고, 이는 집권 여당에게는 악재로 작용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에 대한 구체적 보복 수단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의회와 손발을 맞추겠다고만 밝힌 것도, 선거용 이슈라는 해석을 높인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우디 순방 이후 감산 결정을 막지 못한 데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사우디 내부에서도 '미국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감지돼, 중간 선거가 끝나더라도 양국의 관계 재설정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높다. 사우디와의 협력으로 유지해온 중동지역 질서가 흔들리면서 미국이 입게 될 손해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 중동특사를 지낸 마틴 인디크 미 외교협회 연구원은 "미국은 사우디와 이혼하기보다는 새로운 전략적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며 "석유 생산과 지역 패권에 관해 더 책임감 있는 사우디의 리더십이 필요하고, 사우디는 보다 신뢰할 수 있는 미국 안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양국은 벼랑 끝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