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첫' 기억을 소환하는 46년 전통의 단춧집

입력
2022.10.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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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93)부산 동구 대화단추
1977년 시장  계단 아래 합판 놓고 장사 시작
손님 원하는 단추 무조건 구해주는 신용 바탕
지금도 새 디자인, 예쁜 색깔 단추 구하려 노력
가업 잇는 아들 온라인으로 전국에 단추 공급

"첫 단추를 잘 꿰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으레 나오는 말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매일 단추를 접한다. 첫 출근, 첫 등교 때 말끔하게 차려입은 옷을 입은 순간의 기억에도 단추를 잘 채운 모습이 소환된다. 두 번 다시 없을 첫출발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한 단추의 기억을 46년 동안 만들고 있는 장인이 있다. 부산 동구 부산진시장에서 1977년부터 '대화단추'를 운영하는 이창기(72)씨가 주인공이다.

11일 오전 부산진시장 1층 대화단추에 들어서자 진열대와 진열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3,000여 종에 이르는 수만 개의 단추가 조명 아래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금 단추부터 은은함을 자랑하는 자개단추, 중후한 느낌을 주는 나무단추 등 각양각색의 단추를 보고 있노라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날 가게를 방문한 50대 여성 손님은 자신이 들고 온 블라우스를 진열대에 올려놓고 어울리는 단추를 하나씩 맞춰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점포에는 없는 단추가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며 "내 취향에 맞는 단추를 선택할 수 있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겨울에 입을 외투의 단추를 미리 찾고 있다”고 말한 모녀는 남색 외투에 어울리는 단추를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단추를 주문하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던 이씨는 "손님이 원하는 단추를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단추를 준비하는 것이 46년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가난 싫었던 소년, 단추와의 인연


7남매 중 넷째인 이씨는 경남 함양 출신이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지만 가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살면 가난에서 도저히 못 벗어나겠다"고 생각한 이씨는 새벽 버스를 타고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 15세였던 1965년이었다. 부산에는 아는 사람도, 거처도, 먹을 것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15세 소년이 부산에서 자립하기란 쉽지 않았다. 함양 집과 부산을 오가던 이씨는 부산 신창동의 한 갈빗집에서 일하게 됐다. 월급도 안 받고 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일하던 이씨는 냉면집에서 배달일을 하다 인근 신발가게 주인 제안으로 2년간 장사를 도왔다. 곁눈질로 처음 장사에 발을 들인 셈이다.

그러다 실과 단추를 파는 가게로 옮겨서 일했고, 군대 제대 이후에도 단추 배달을 했다. 그때 한 지인이 "단추 가게를 직접 차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부산진시장 1층과 2층 계단 아래 반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서 단추를 팔기 시작했다. 1977년이었다.


단추 없어 못 팔던 전성시절 구가

제대로 된 진열대도 없이 합판 위에 단추를 놓고 장사를 시작했지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당시를 회상한 이씨는 "정말 장사가 잘됐다"며 "옆 가게에서 단추를 100원에 사서 120원에 팔았고, 아침에 공장에서 떼 온 단추가 다 팔려 저녁에 다시 공장 가서 받아오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진시장 인근에서는 신발 산업이 번창했다. 신발 공장 근로자들 대부분이 양장점에서 옷을 사 입었고, 양장점에서는 그만큼 단추가 필요했다. 이씨는 "지금의 휴대폰 가게처럼 부산 서면 일대에는 양장점이 즐비했고, 중소 옷 공장들도 많아 단추 수요가 많았다”고 했다.

이씨는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휴일도 없이 일했다. 단추 주문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납품 기일을 맞췄다. 신뢰가 장사의 기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씨는 "남들이 한 발 뛸 때 나는 두 발 뛰고, 남들이 밥을 씹을 때 나는 밥을 마신다는 마음으로 일했다"면서 "모든 장사가 마찬가지겠지만 신용을 지키기 위해 단추를 구하고,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 가게를 열 때 중고로 구한 단추 구멍 뚫는 기계를 아직도 사용 중이다. 장사가 호황을 누리면서 이씨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가게를 확장해 2000년 지금의 가게에 자리 잡았다. 이씨는 “지금도 새로운 디자인의 단추, 좀 더 예쁜 모양이나 특별한 색깔의 단추를 갖추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를 이어가는 단추 점포가 되다

대화단추에는 ‘작은 사장님’이 있다. 이씨의 아들 태훈(38)씨다. 점포 직원과 통화할 때 ‘사장님을 바꿔 달라’고 하면 ‘큰사장님’이냐, ‘작은사장님’이냐고 묻는다. 대학을 졸업한 태훈씨가 2010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어서다. 태훈씨는 "사춘기 때 아버지 일을 부끄러워한 적도 있지만 크면서 아버지께서 하는 일이 가족을 위한 노고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가업을 잇는 이유를 설명했다.

태훈씨는 대학생 때도 틈틈이 아버지 일을 도왔지만 막상 본업이 되니 손님이나 거래처를 대하는 등의 모든 과정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단추 가게 운영이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 태훈씨에게 큰 힘이 된다.

태훈씨가 적응에 성공하면서 온라인 판매 방식을 도입했다. 태훈씨는 "아버지의 기존 거래처나 단골이 아닌 새로운 고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단추를 파는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처음 1~2년은 온라인 판매가 쉽지 않아 매출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단추가 나오면 사진을 찍어 올리는 등 꾸준히 사이트 관리를 했고, 3년이 지나자 서울과 경기 등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훈씨는 “전국의 의상실, 수선실, 세탁소 등에서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부산과 인근에 머물렀던 아버지의 사업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태훈씨는 가업을 잇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그는 "친구나 주변에서도 가업을 잇는 사실을 부러워한다”면서 “부모님을 뵙기 위해 일부러 찾기도 하는데 항상 곁에 함께 있는 것도 좋은 점인 것 같다”며 겸연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아버지 이씨는 “손님들이 우리 가게에서 자신이 원하는 단추를 구해 작으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면서 “그것이 내가 평생 단추와 인연을 맺은 이유가 되고 보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권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