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파 눈치 본 푸틴, 이틀째 공습 단행...우크라 시민들은 '의연'

입력
2022.10.11 21:00
17면
내부 강경파 달래려 공습 단행
우크라 시민들 일상복귀 등 단합된 모습 
 "공습 비효율적...지속 어렵다" 전망도

크림대교 폭발에 따른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보복 공습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이틀째 이어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민간인 희생이 불가피한 대규모 공습을 강행한 이유는 우크라이나 사기를 꺾어 수세에 몰린 전세를 단박에 뒤집고, 핵무기 사용 등 총력전을 주장하는 자국 내 보수 강경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차분히 일상에 복귀하는 등 의연히 대처해 러시아의 공습 의도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러시아 공습으로 124명 사상..."우크라이나 전세엔 큰 영향 없어"

11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전날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을 받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이날에도 공습이 이어졌다. 자포리자의 러시아 점령지 행정부 위원회 주요 멤버인 블라디미르 로고프는 텔레그램을 통해 "자포리자시에서 최소 16차례 폭발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6시쯤 첫 폭발 이후 40분가량 연속으로 폭발이 발생했고, 도심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정전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이날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도 여러 차례 폭발음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이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빈니차, 오데사, 수미, 드니프로 등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이날 공습경보가 울렸다. 우크라이나 국가응급서비스는 "오늘 우크라이나 영토에 미사일 공습 가능성이 크다"며 "안전을 위해 방공호에 머물러달라"고 당부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전날 러시아군의 공습에 따른 사상자는 이날까지 사망자 19명, 부상자 105명으로 집계됐다. 우크라이나 르비우와 중부 폴타바, 북부 수미, 하루키우 등 4개 도시에선 전기와 온수 공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전날 연설을 통해 “에너지 시설이 전국적으로 타격을 받았다”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복구 작업을 완료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자국 정치용으로 공습 지시한 듯

사실상 민간인을 겨냥한 러시아의 공습에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은 높아지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국가들도 우려 성명을 발표할 정도다. 푸틴 대통령 역시 이런 상황을 예상했겠지만 국내 여론을 우호적으로 바꾸기 위해 충격요법을 썼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현재 연일 패퇴하는 러시아군에 대한 비난과 예비군 동원령에 대한 시민들의 집단 반발로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좁아지는 중이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하는 자국 내 강경 보수파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키이우 등을 향한 대규모 공습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러시아군 수뇌부를 비판했던 람잔 카디로프 체첸 공화국 수장은 이번 공습 이후 “젤렌스키, 우리는 러시아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고 경고했다”며 “이제 전쟁 진행에 100% 만족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의 6분의 1 이상을 점유한 상황에서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민간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대학과 도서관 등 민간인 시설을 폭격한 건 물론 전력과 상수도 등의 인프라 시설도 대거 파괴했다. 이에 따라 올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전력망과 난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영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윌리엄 알베리케 군사전문가는 NYT에 “우크라이나인들의 공포심은 우크라이나 지도부와 서방 국가들 간 단결을 약화시킬 것”이라며 “이를 위해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장기화하면서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에 치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대규모 공습 지속하긴 어려워

하지만 러시아의 예상과 다르게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대규모 공습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공습 당일인 전날 대피소에 머무르면서도 국가를 함께 부르며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공습 동안 대피소로 사용된 키이우 시내 한 지하철역에서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민요(In the Cherry Orchard)를 함께 부르거나, 놀이터에서 공습경보가 끝난 후 어린이들이 미끄럼틀 위에 올라 국가를 부르는 영상이 올라왔다.

차분히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키이우에선 전날 공습이 그치자 한때 상점과 음식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최근 키이우로 이사를 온 올렉시 스트리아프코는 가디언에 “이제는 전쟁이 시작됐을 때만큼 두려움을 느끼진 않는다”며 “위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이 같은 대규모 공습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전쟁이 200일 이상 이어지면서 러시아군의 군사적 자원이 상당히 고갈돼 크루즈미사일 등을 동원한 정밀타격 작전은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민간인을 겨냥한 공습은 효율적인 전략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군사 전문가를 인용해 "돈바스 지역으로 진격하는 우크라이나군의 보급로를 타격하거나 러시아 지상군을 지원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 가디언 역시 “공습받은 우크라이나 지역들은 군사적인 중요성이 없는 곳들”이라며 “러시아의 공습이 양측 간 힘의 균형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김현우 기자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