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아닌 오토바이로 가득 찬 도로, 20년 전 한국 수준의 낙후된 사회 인프라. 우리가 떠올리는 가장 흔한 베트남의 이미지다. 지역마다 다소 편차는 있어도 지금의 베트남 현실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도 사실이다.
국가 이미지가 이렇다 보니 베트남과 '디지털'이라는 단어와의 거리감은 멀다. 하지만 현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디지털 활용도와 접근성이 한국 못지않다는 점을 바로 깨닫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은 인구 9,800만 명의 46.5%가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한 20~40대로 구성된 나라다.
수요가 충분하니 디지털 시장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12일 베트남국가혁신센터(NIC)의 '기술혁신 및 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은 2040년 자국 인구의 세 배에 달하는 '동남아 경제대국' 인도네시아에 이어 아세안 2위 규모의 디지털 경제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경제에 기반한 베트남 유망 스타트업을 향한 글로벌 투자유치액도 지난해 14억4,200만 달러에 달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2020년에만 4억5,100만 달러로 줄어들었을 뿐, 2019년(8억7,400만 달러) 대비 150%가량 증가한 수치다. 특히 베트남은 1,000만 달러 이상 대형 투자유치건이 전체의 82%를 차지하는 등 규모와 내실 모두 챙기고 있다.
베트남이 스타트업 키우기에 집중한 시간이 6년도 채 안 됐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베트남 정부는 2016년 '844/QD-TTD' 결정문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고 천명했다. 그 결과, 현재 베트남은 VN페이 등 기업가치 1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을 뜻하는 '유니콘 기업' 4곳을 보유했다. 30년이 넘는 스타트업 육성 역사를 가진 한국이 올해 기준 15개의 유니콘 기업을 배출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한국 스타트업 기업들도 앞다퉈 베트남을 향했다. 음악부터 드라마·음식까지 한류가 넘쳐나는 곳, 삼성 등 9,000여 우리 기업들이 터를 잡고 있는 나라. 베트남은 한국 스타트업 진출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나라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한국 스타트업 기업은 현지 시장에서 성공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베트남 애플리케이션(앱) 마켓에서 공룡기업인 쇼피와 라자다에 이어 3위를 기록 중인 중고 오토바이 거래 플랫폼 기업 '오케이쎄'(OKXE)가 대표적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기반을 둔 오케이쎄는 오프라인 시장에서만 이뤄지던 중고 오토바이 거래를 처음으로 온라인 플랫폼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스타트업이다. 현재 오케이쎄 앱 다운로드 횟수는 800만 건을 돌파했으며, 매월 10만 대의 매물이 등록되면서 거래 규모도 300억 원을 넘어섰다.
남부 호찌민에선 온라인 이커머스 전문기업인 '마켓사이공'(Market Saigon)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다. 2019년 설립된 마켓사이공은 한국 식자재와 상품을 온라인 마켓에 선별해 제시한 뒤, 주문 후 1시간 이내에 물건을 배송하는 '콜드체인' 방식을 채택했다.
특히 마켓사이공은 코로나19 대확산으로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졌던 지난해 월 매출이 종전보다 4배 이상 늘어났다. 현재 마켓사이공은 3,500여 개의 한국 및 베트남 상품을 취급하며, 국내 1위 배달앱 '배달의민족' 베트남법인 등과도 온·오프라인 협업을 시작했다.
한국 기업의 성공기가 이어지자,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한국 스타트업도 점차 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되기 시작한 지난 5월 이후 매달 평균 20여 개의 스타트업 기업이 베트남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야말로 '베트남 공략 러시'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2의 오케이쎄·마켓사이공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철저한 현장 조사와 준비도 없이, 그저 "한국에서 잘나갔고, 베트남엔 없는 아이템이니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오만에 사로잡혀 베트남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유에서다.
베트남에 안착한 스타트업계 관계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도 베트남을 얕잡아보는 정서적 접근이었다. 심동준 마켓사이공 대표는 지난 6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규 스타트업 대부분이 베트남을 '뒷돈이면 웬만한 행정 절차는 다 해결되는 나라'라고만 인식하고 있다"며 "그러나 베트남은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로, 특유의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마켓사이공도 수개월 동안 사업자등록증부터 창고·소방·신선유통·주류유통 허가증 등을 일일이 취득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오케이쎄 역시 사업 초기 서비스 론칭이 12번이나 미뤄질 정도로 현지 정착에 애를 먹었다.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을 '뒷돈'으로 해결하는 것도 과거에나 가능했다. 베트남은 지난해 13차 전국 공산당대회로 선출된 새 지도부가 '행정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어 이전보다 더 철저한 서류 증빙을 요구하고 있다.
"인건비가 한국의 절반"이라는 말만 믿고 사업 시작과 동시에 인력부터 무리하게 확충하는 관행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베트남의 인건비가 저렴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공장 노동자 등 블루칼라 계열에서나 통용된다. 외국어를 구사하며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화이트칼라 전문 인력의 인건비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이다.
양국의 투자 환경 차이도 '필수 체크 포인트'다. 대부분의 신규 스타트업 기업은 한국에 본사를 두고 베트남법인을 자회사로 만들어 자금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진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민연금 등 공적기금은 해외 스타트업 투자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고, 민간기업도 타 해외 법인에 직접 투자하는 데 제약이 많다.
물론 베트남 현지에서 투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그러나 '외화유출'에 극도로 민감한 베트남은 본사가 외국에 있는 현지법인에 대한 자국기업의 투자를 엄격히 조사하는 나라다. 안정적인 투자금 확보 방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무실 간판만 건 상태로 사업을 시작조차 못 할 수 있다.
김우석 오케이쎄 대표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와의 대담에서 "한국 스타일과 발상은 현지에서 사업을 전개할 때 오히려 어려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며 "베트남에서 스타트업을 할 생각이라면 현지인의 문화와 감정선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타트업을 '경제성장 신동력'이라고 주창하는 한국 중앙정부는 베트남에 진출한 스타트업에 대해 "알아서 잘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 코트라 하노이·호찌민 무역관 등이 베트남 진출 스타트업을 상담해주고 있으나, 부족한 예산과 인력 문제로 수요를 따라가기 버거운 게 현실이다.
중앙정부의 빈자리는 한국의 수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메우고 있다. 서울과 호찌민처럼, 베트남 각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은 한국의 지자체들이 현지 진출 한국기업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게 그나마 남은 '동아줄'이란 얘기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민간기업이 직접 베트남 측과 협상을 벌이는 경우도 다반사다. 실제로 글로벌 투자 전문기업인 한국의 엑센트리 벤처스는 지난 7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과학기술부 산하 국립스타트업지원센터(NSSC)와 단독으로 업무협약을 맺은 바 있다.
베트남 현지 산업계 관계자는 "창업진흥원 등에서 스타트업 해외진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에만 국한돼 있다"며 "한국 정부가 보증하는 방식으로, 더 늦기 전에 우리 스타트업과 베트남 현지 투자자 및 정부 관계자와의 네트워킹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