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불현듯 메밀꽃이 생각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토록 아름답게 메밀꽃을 표현하다니 곱씹을수록 입에 감긴다. 하지만 하얀 메밀꽃 말고 ‘붉은 메밀꽃’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원 영월군 삼옥리 먹골마을 앞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붉은 메밀꽃이 피어난다. 그 ‘매혹적인 붉음’이 알음알음 알려져 이제는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지난 주말 번잡한 시간을 피해 이른 아침 삼옥리 먹골마을을 찾았다. 이른 새벽이라 안개가 붉은 메밀꽃을 감싸고 있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푸른 신록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한을 지켜본 동강이 먼저 눈 안에 들어왔다. 숙연한 마음으로 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느덧 주변에 햇살이 스미고 안개 속에 숨어 있던 메밀꽃이 얼굴을 드러냈다.
얼마쯤 흘렀을까. 갑자기 사방이 온통 붉은 비단을 깔아놓은 듯 찬란하게 변한다. 메밀꽃의 ‘붉은 비단’과 동강에 녹아내린 ‘녹색 비단’이 하나가 되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 풍광 속에 한 가족이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들어왔다. 알고 보니 노모에게 붉은 메밀꽃을 보여주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따뜻한 가족 사랑에 붉은 메밀밭이 유난히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