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점점 짧아지고 날씨가 스산해지니 괜스레 마음이 심란해진다. 가을에 시작된다는 계절성 우울증 탓인가 싶어 일부러 햇볕도 많이 쬐보고, 사교활동도 늘려 보지만 헛헛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쓸쓸함과 공허함을 뭘로 채워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중 불현듯 지난해 여름 방문했던 1인 사색 공간 '머물다 사당'이 생각났다. 서울 한복판에서 3시간 동안 혼잡함을 벗어나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곳. 계절마다 콘셉트가 바뀌는 이곳의 이번 가을의 테마는 때마침 '외로움 보호구역'이었다.
이곳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큐레이션 독립 서점 '지금의 세상'을 운영하는 김현정 대표의 두 번째 공간이다. 2018년 시작한 책방 '지금의 세상'은 서점 방문자들이 남긴 사연에 맞는 책을 추천해준다. 서점 창업 전까지 교육 기획 관련 업무를 하던 그는 힘들 때 책을 통해 스스로 단단해진 경험을 했다. 책을 매개로 각자가 가진 고민을 스스로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민 큐레이션 서점'을 만들게 됐다.
책방 운영 4년 차가 되던 지난해 여름, 김 대표는 '혼잡한 도시에서 혼자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본 것이다. 단순히 책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책과 함께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3일 저녁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머물다 사당'을 찾았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길에는 약주 한잔에 벌게진 얼굴을 한 이들이 많았다. 행여나 고기 냄새가 옷에 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대문을 열자 느껴지는 은은한 조명과 차분한 피아노 선율에 순식간에 날아갔다.
대문을 여니 화장실과 메인 공간의 문이 보였다. 신발장 옆에는 간단한 공간 소개가 적혀 있었다. "서점에 숨어 부단히 저 자신을 만났고 사연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혼자 웅크려 있던 어두운 동굴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동굴로 변화시킨 성장을 '머물다 사당'이라는 공간으로 공유하려 합니다."
메인 공간의 문을 여니 따스한 가을날 풍경이 원목 가구들과 벽 곳곳에 붙은 포스터에 담긴 듯했다. 공간 한 구석에는 웬 메모장들이 빼곡히 붙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내면 속 이야기들이 포스트잇 위에 적혀 돌멩이 탑 위에 붙어 있었다. '여기 머물다 가는 모든 분들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라는 소박한 축복부터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마치 방문자 개개인만의 '사당(祠堂)'이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원형 테이블 위 카드에는 왼쪽 벽에 붙은 사색 포스터를 보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사색 포스터에는 '사색 카드는 계절 큐레이팅에 따른 책을 읽고 만들어집니다. 향유하고 싶은 문장과 사색거리가 담겨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번 테마의 메인 책은 노르웨이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의 '외로움의 철학'(청미 발행).
'우리가 과거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고립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다. 오히려 우리는 과도하게 사회적인 존재가 됐다. 따라서 자유로운 개인이 외로움과 관련해 겪는 문제는 지나친 외로움이 아니라, 너무 사교적인 나머지 희박해진 고독이리라.'
이 발췌 문장에 이어지는 질문은 "내가 생각하는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는?"이었다.
분명 온오프라인 경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와 타인을 부지런히 알아가고 있는데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카드는 "'타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소외'가 외로움이라고 한다면 '자발적인 격리'가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라며 "자발적인 격리, 고독한 이 시간의 감정과 느낌을 느껴봐"라고 안내했다.
마침 공간 곳곳엔 자발적 격리와 멈춤을 돕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김 대표가 추천하는 책 여러 권과 명상 도구가 놓여 있었다. 안내카드에 따라 향수와 핸드크림의 향을 맡으며 명상 리추얼 카드를 적었다. '심연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양면성을 표현했다'는 국내 모 향수 브랜드의 시그니처 향을 음미했다. 달콤한 무화과, 신선한 풀, 평온한 숲속이 느껴졌다.
명상 안내 음성에서는 파도 · 호흡 · 바람 · 싱잉볼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성 속 안내자는 "향을 맡으며 소리를 듣는 나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다채로운 모습이 생각났다. 금방 설렜다가 또 금세 시무룩해지는, 활기차면서 또 동시에 차분해지는 스스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제3자의 눈으로 관찰되는 스스로가 낯설어 급히 눈앞에 놓인 책 '외로움의 철학'을 펼쳤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얼마만큼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느냐가 아니라 개인이 타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느끼느냐다. (…) 외로움은 타인과의 연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문득 최근 관심을 갖게 된 한 이성의 작은 언행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모습이 떠올랐다.
서재 한 켠에는 방문 후기를 남기는 '경험 기록지'가 있었다. 지난해 7월 공간 오픈 때부터 꾸준히 쌓여 현재는 3권째 공책을 쓰고 있다. 한 방문자는 지난달 30일 "여기 올 때마다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을 느꼈는데 오늘은 다르다"며 "외로움을 느낄 틈새가 없었던 것 같은데, 막상 3시간이 지나니 적막감만 안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고 적었다.
지난달 26일에 쓰인 후기에는 이런 단상이 담겨 있었다. "음성을 녹음할 수 있는 곰인형이 있어서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내 목소리를 반복 재생하며 곰인형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외로움이 있었던 것 같다. 문득 '외로움이란 감정은 내가 만든 것이고, 그 감정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테이블에 놓인 수선차(水仙茶)를 마시며 곰인형을 집어 들었다. 다음 방문자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있는 그대로의 너를 느껴봐." 일희일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판단 혹은 평가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니 결핍에 따른 쓸쓸함보다는 왠지 모를 충만함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계절마다 큐레이션이 바뀌는 덕에 재방문율이 높다"며 "특히 육아로 바쁜 친구에게 예약 티켓을 주는 사람도 있고, 먼저 다녀간 딸이 엄마에게 티켓을 선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딸에게 체험권을 선물받고 방문한 60대 시인 이모씨는 "일상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초록빛을 이곳에서 잠잠히 느끼니 영감이 떠올라 시 한 편을 바로 썼다"고 말했다.
올봄의 주제는 '꽃 속에서도 헤매고 있을 당신에게', 여름의 주제는 '내면 아이'. "계절마다 주제를 정하고 도구를 큐레이션하는 일은 어렵지만, '이번엔 또 어떤 인생이 다녀갈까'는 생각에 늘 설레고 긴장된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