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의 대만해협 한가운데 반도체가 있다. 대만은 동아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비유된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처럼 중국에게 대만은 미수복지다. 상당수 대만인들은 더는 미국이 지켜줄 것으로 믿지 않고, 그렇다고 대만이 중국 침략에 준비돼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마저 “오늘 우크라이나는 내일 동아시아가 될지 모른다”며 중국의 대만 침략을 공개 우려했다. 그러나 대만이 우크라이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실리콘 실드(반도체 방패)를 가진 점이다.
반도체 방패론은 대만 침공의 강력한 반대논리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미국 모두 대만 반도체의 중요성 때문에 전쟁 문턱을 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2001년 처음 등장한 이 반도체 방패론은 대만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TSMC를 비롯 스마트폰 칩셋, 반도체 조립 및 테스트, 실리콘 웨이퍼 등을 공급하는 주요 기업들이 대만에 집중돼 있다. 실제로 미국과 대만의 관계도 반도체를 계기로 더욱 긴밀해졌다. 대만해협 긴장에 침묵해온 유럽이 대만 지지로 복귀한 것 역시 반도체 때문이다. 지난달 15일 유럽의회는 "반도체 방패를 강화해 대만 안보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친대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반도체의 대만이 제2의 우크라이나가 아닌 것은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8월 초 대만 방문 때 정작 중국은 TSMC 창업자 장중머우(모리스 장), 회장 류더인이 그를 만난 사실에 더 화를 냈다. 중국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며 경고성 경제제재를 가했지만 TSMC 제재는 자국 피해를 우려해 하지 않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대만을 되찾겠다고 공언하지만 대만 정복은 경제적 번영의 포기를 뜻한다. 대만 반도체 없이는 2035년까지 경제력을 두 배 늘리고 핵심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은 불가능하다. 중국은 세계 가전산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이에 필요한 반도체는 6%만 생산할 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드러난 복잡한 글로벌 생태계로 인해 대만의 반도체 위상은 더 확고해졌다. 미국만 해도 아이폰에서 F-35전투기에 이르기까지 첨단 반도체의 70%를 대만에서 공급받고 있다. '반도체 방패' 용어를 처음 쓴 언론인 크레이그 애디슨은 최근 다큐멘터리 ‘실리콘 실드 2025’에서 대만 반도체의 지배력이 훨씬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반도체가 대만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커진 영향력이 되레 반도체 방패의 유효성을 흔드는 건 아이러니다. 대만의 강화된 반도체 시장 지배는 한편으로 세계 경제에 심각한 도전인 것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기간 반도체 공급난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는 작년에만 2,100억 달러의 매출 손실이 발생했다. 아예 대만 반도체 공급이 중단되거나 생산시설이 파괴된다면 세계는 대공황 같은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지나 레이몬드 미 상무장관은 세계 경제가 깊고 즉각적인 경기침체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선 반도체 방패와는 반대로 자국에 절대 필요한 TSMC를 갖기 위해서라도 무력통일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천원링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 총경제사는 지난 6월 베이징 포럼에서 실리콘 마그넷(반도체 자석)론을 폈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칩4), 미국 내 TSMC 공장 유치로 대중국 기술 제재의 심각성이 커지는 데 따른 대응책으로 본래 중국기업인 TSMC를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반도체 실력이 방패가 아니라 중국 야망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천 총경제사의 주장은 대만침공에도 반도체 시설이 파괴되지 않고, 반도체 제조·연구능력의 독점권을 확보해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중국으로선 침공 시 이들 공장 점거가 최우선 과제가 될 수 있다. 이에 미국 전문가들은 중국 침공 때 반도체 시설의 파괴를 분명히 하고, TSMC의 핵심 지적 자산을 역외로 이전시켜 ‘반도체 자석’의 매력을 낮추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유라시아그룹 루샤오멍 국장은 “대만은 이런 시설을 중국에 넘기기보다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파괴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반도체 시설 파괴에 대해 대만 입장이 미국과 동일할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류더인 TSMC 회장은 CNN에 “외부 세계와 실시간으로 연결된 아주 정교한 제조 시설”이라며 “모든 사람의 노력으로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무력으로 뺏는다 해도 가동시킬 수 없다”고 했다.
랜드연구소 제이슨 매서니 대표는 3일 외교전문지 애틀랜틱 기고에서 “대만을 장악하면 중국이 세계 반도체 공급을 통제하거나, 대만의 반도체 공장이 파괴될 수 있는데 어느 쪽이든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두 재앙을 회피하려면 대만 밖에 반도체 생산 대체지를 확보하거나, 중국 공격에 즉각적인 대만 방어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대만 반도체 산업은 40년 축적된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어 대체 생산 구축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미군의 방어 역시 시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반도체 공장이 파괴된 이후 가능하다. 더욱이 대만 반도체 생산시설은 중국군 상륙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집중돼 있다.
매서니 대표는 어느 경우든 경제혼란이 불가피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대만의 자위력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러시아의 침공에 성공적으로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처럼 대만을 무장시켜 중국의 침공에 맞서도록 해 그 비용을 높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대만을 무장시키는 데도 수년이 걸리고, 이는 대만을 강대국의 볼모로 삼는 논리일 수 있다.
이 대만 밖의 자국에 반도체 제조역량을 키워 공급망 재편을 하려는 것에 불편해하는 시선은 중국만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달 28일 대만 한국 일본과 함께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고립시키는 칩4 첫 준비회의를 가졌다. 이와 별도로 TSMC와 삼성전자를 유치해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중국 견제의 명분을 빼고 볼 때 1980년대 일본 업체들을 쇠퇴시키고 자국 반도체 산업을 일으켜 세운 경로와 유사하다. 대만 입장에서 당장은 아니라 해도 생산시설 이전은 반도체 방패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
반도체 방패론이 흔들리면서 대만 전문가들은 시진핑 3기에 대만의 현상유지가 힘들어질 것이란 전망을 내고 있다. 시 주석의 집권 3기를 결정할 공산당 제20자 전국대표자대회(당대회)는 16일 베이징에서 개막한다. 집권 연장의 축제가 될 이번 당대회에선 당장(당헌)에 대만문제 해결이 명시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 경우 시 주석은 지금의 대만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대만수복 업적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 주석이 무력통일을 시도할 조건들도 성숙되고 있다. 집권 3기 시한인 2027년은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으로 미중 경제규모의 역전이 일어날 수 있다. 에이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2030년까지 대만해협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될 수 있다고 예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안을 더하는 건 조 바이든 미국 정부의 혼란스런 입과 움직임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까지 4차례에 걸쳐 중국이 침공하면 대만방어를 위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는데 그때마다 백악관, 국무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변화는 없다고 물러섰다. 미국기업연구소(AEI) 코리 셰이크 국장은 미국의 정책 목표와 의지의 차이가 심각한 문제라고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지적했다. 의회에선 지난달 14일 상원 외교위를 통과한 대만정책법안을 비롯 대만무장법, 대만억제법 등이 추진되고 있다. 사실상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거나 안보 지원을 합법화해 중국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1995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모교인 코넬대 강연을 위해 신청한 미국 비자가 발급됐다. 미 의회가 방문허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행정부도 어쩔 수 없이 비자를 내줬다. 격분한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며 군대를 집결시켰고 미군은 전함들을 급파해 대응했다. 비자에서 시작된 3차 대만위기처럼 사소한 사건이 군사적 충돌로 발화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금 대만해협의 긴장은 팽팽하다. 중국은 대만해협 인근에서 민간 자동차 운반선까지 동원한 상륙작전을 벌이고 있다. 최근의 거칠어진 중국의 공세와 미국 조야의 혼란스럽고 긴박한 움직임은 반도체 방패론의 유효기간이 다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