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평생 책을 끼고 살았습니다."
이수헌(75) 전 칠곡 왜관농협 조합장과 마주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경북 칠곡 중심의 향토사에 해박하기 그지없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수준이다. 어릴 때부터 늘 역사책을 끼고 살았다. 2015년 농협 조합장 3선연임이 충분히 가능했는데도 향토사를 공부하고 싶어 선거를 접었을 정도다. 이때 "앞으로 초야 들어가 텃밭 가꾸고 책에 묻혀 살면서 열심히 일하는 지역 일꾼들이 찾아오면 홍두깨로 칼국수를 만들어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면서 '홍두깨 조합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역사 ‘실력’은 2016년에서 2018년까지 민주평통 칠곡군협의회장을 맡으면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른바 303고지 성역화에 큰 기여를 했다. 칠곡군 왜관읍 근교의 자고산에 위치한 303고지는 경부선 철도와 국도가 관통했던 곳으로 1950년 8월17일 북한군이 이곳에서 미군 포로 41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벌였다. 미군 사령부가 북한군 사령부에 학살 행위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요구하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같은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이 사건은 미국언론에도 보도되었을 만큼 큰 이슈였다. 이 전 조합장은 "미국내 반전여론을 잠재우고 미군의 적극 개입을 이끌어냈을 만큼 큰 사건이었는데도 그 유적지를 방치하다시피하는 데 많이 놀랐었다"면서 "행정당국에 요청한 끝에 경북도비와 칠곡군비 28억 원을 투입해 주변을 말끔하게 정비하는 성과를 끌어냈다"고 밝혔다.
‘A특공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지게부대에 대한 관심도 많다. 6.25 한국전쟁 당시 15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을 했던 칠곡군 석적면 망곡1리 인근의 328고지 격전에서 활약했다. 민간인들이 스스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부상자와 사상자를 후방으로 싣고 오는 역할을 자임했다. 이 전 조합장은 "워커 사령관이 '이런 충성심 있는 나라를 지켜줄 가치가 있다. 지게 부대 노무병들이 없었으면 미군 10만 명을 증파해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면서 "지게부대원 5만 이상이 희생당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조합장은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말로만 호국보훈의 도시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지역 곳곳에 남은 역사적 흔적과 증언, 기록을 충실하게 그러모아야 합니다. 역사적 근거와 지식이 지역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전 조합장에 따르면 팔공산을 중심으로 대구와 군위, 칠곡은 예부터 전쟁이 자주 벌어졌다. 우선 삼국시대부터 보면 김유신과 소정방이 고구려로 진격할 때 좌우의 군대가 합한 곳이 바로 군위였고, 왕건이 팔공산에서 여덟 공신을 잃고 견훤에 쫓겨 도피할 때 왜관을 거쳐 약목, 금오산, 김천으로 향했다. 또한 석굴암보다 먼저 세워진 제2석굴암이 있고 칠곡 송림사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명부전이 들어서 있는 것 또한 이곳에서 많은 군사작전과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군위의 지명 유래에 대한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군위라는 지명 자체가 특별합니다. '군(軍)' 자나 '위(威)' 자처럼 드센 글자를 지명에 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늘 궁금해하던 차에 우연히 군위 효령면을 지나다가 장군동이라는 지명을 발견했습니다. 사당에는 김유신과 소정방 장군을 모시고 있더라고요. 당시 두 장군의 부대가 이곳에 잠시나마 주둔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전 조합장은 팔공산 인근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가 된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칠곡 가실성당이 서울의 명동성당보다 먼저 건축되었는데 이는 칠곡이 낙동강 물길과 영남 육로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었다"면서 "전쟁도 결국은 물류 병참선이 핵심이어서 교통의 중심지였던 칠곡에 부대가 몰리기 마련이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외골수처럼 역사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현실 문제에도 적극 뛰어 들었다. 최대 200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칠곡왜관공영주차장이 문을 연 데는 이 전 조합장의 공이 컸다. 2005년 이전만 해도 철길 옆 빈터에 불과했던 곳을 유용한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짓는 이들이 많았지만 당시 군수에게 공덕비를 세워주겠다는 약속 등을 통해 동기부여를 했고 이 아이디어 덕분에 일이 멋지게 성사되었다.
"아내가 30년 동안 왜관 시장에서 참기름집을 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의 딱한 형편을 외면할 수 없었지요. 대형 주차장 덕분에 상권이 살아났다고 아내와 상인들에게 인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전 조합장의 마지막 꿈은 도서관을 짓는 것이다. 이름은 벌써 정했다. '둔촌 만권당'. 지역의 역사와 고전,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고루 갖춘 서고를 들일 계획이다. 현재 1,500권 정도의 책을 모아뒀다.
"평생 책을 가까이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또 사서 읽었습니다. 농협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책방 주인이 저에게 '자네만큼 책 많이 산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에게는 훈장 같은 말이었습니다."
"광주이씨 중흥시조이신 둔촌 이집(李集, 1327~1387)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는 글귀이자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문과 지역을 위해서 할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