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 공포가 빚은 풍경

입력
2022.10.06 04:30
26면
10.6 방사능 낙진 대피소

1945년 핵폭탄의 위력을 간접 체험한 미국인에게 4년 뒤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충격이었다. 소련은 1955년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다. 미국은 그해 연방민방위청(FCDA)을 설립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냉전 핵공포의 절정이었다면, 1961년 착공된 베를린장벽은 가시적인 전조였다. 1961년 5월 FCDA 청장 넬슨 록펠러의 방사능 낙진 방비 프로그램 제안을 수용한 존 F 케네디는 의회에서 소련의 돌발적 핵공격에 대비해 민간 차원의 안전 방위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베를린장벽 방침이 확인된 7월 25일, 전국 TV 방송 연설로 “소련 핵공격 시 화염과 폭격의 직접적 충격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의 생존을 위한 대피소가 필요하다”며 “가족의 안전을 위해 시민 각자가 지체 없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0월 6일 “방사능 낙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민간 보호 시설” 지원 비용으로 의회에 2억여 달러의 특별예산을 요구했다.

이듬해 1월 잡지 ‘Life’지는 ‘낙진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와 함께 대피시설을 활용하면 97% 생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케네디 편지까지 실었다. 의회는 공공·개인 대피시설 건축, 개조 및 위치 홍보 등을 위한 1억6,900만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건축·장비업체들의 “튼튼하고 안전한” 대피시설 판촉 경쟁도 이어졌다. 한 합판 제조업체는 우편으로 25센트만 보내면 자재 홍보물과 함께 대피시설 DIY 건립 매뉴얼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피소가 갖춰야 할 기본 시설과 저장식 등에 대한 홍보도 이어졌다.

반발도 물론 거셌다. 대피소를 세울 여력이 있는, 즉 돈과 지하실과 정원을 보유한 중산층 이상 부유층만을 위한 대책이라는 비판, 핵전쟁 공포를 국가가 조장, 확산한다는 비판 등이었다. 1965년까지 미국 각 가정에 건립된 개인 대피소는 약 20만 개에 달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