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전문가인 ○○대병원 ○○○ 박사에게 진료 의뢰를 하러 전화했더니 2024년 11월까지 예약이 차 있다는 황망하고 황당한 답을 들었습니다. 그때가 2021년 9월입니다." 한국일보 설문지에 한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의 부모가 남긴 하소연이다.
발달장애(지적·자폐성)는 조기에 재활치료를 시작할수록 예후가 좋다는 게 정설이다. 최근엔 아예 만 3세 전 치료를 시작해야 효과가 크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그러나 관련 분야 전문가의 심각한 수요·공급 불균형 속에서 발달장애 아동들은 조기 개입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 기자는 9월 중순 유명 자폐 전문 교수들에게 진료 문의를 해봤다. 하나같이 "현재는 예약 자체가 안 된다"는 대답이었다. 천근아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2027년까지, 김붕년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2025년까지, 유희정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2024년까지 이미 예약이 다 차 있고 이후 스케줄도 나와 있지 않다고 했다.
동네 병·의원에서도 물론 진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부모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학병원의 유명 전문의를 찾는다. 정확하고 꼼꼼한 진단을 받고 싶고, 발달재활치료 방향에 대한 조언도 얻고 싶어서다.
한국일보의 설문조사 결과, 대학병원 등 3차 의료기관(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한 경우 접수 후 1년 이상 기다린 응답자는 제주(27.9%), 경기(19.7%), 서울(18.4%) 순으로 높았다. 광주(18.2%), 인천(14.8%)이 뒤를 이었다.
제주에는 상급종합병원이 없고, 수도권은 의료 인프라가 잘 돼 있지만 인구가 많고 전국에서 환자가 몰리다 보니 대기 기간이 긴 것으로 풀이된다. 경북은 '1년 이상 기다렸다'고 답한 사람이 없었는데, 대구·경북권엔 상급종합병원이 5곳 있다. 강원(2곳), 충북(1곳), 전북(2곳), 광주·전남 및 대전·충남(각 3곳)에 비해 나은 편이다.
의원·병원 등 1·2차 의료기관을 '3개월 이상' 기다렸다고 답한 비율도 제주(52.4%), 인천(33.3%), 서울(31.1%), 부산(30.2%) 등에서 30%를 넘었다.
지적장애에 자폐를 동반한 5세 아동을 키우는 최은희(가명)씨는 "(거주하는) 광주 지역 대학병원도 두세 달 기다렸는데, 서울은 1년이 기본이래서 엄두도 못 낸다"며 "발달장애 아동은 1년이면 그새 상태가 악화되기 십상이다. 유명 교수님들 진료도 받아보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지만, 다들 기다리다 지쳐 포기한다"고 씁쓸해했다.
경북에 사는 김금화(35)씨도 지난해 자폐 소견을 받은 45개월 아들의 발달검사를 최근 다시 받아보려다 좌절했다. "올해 5월에 문의했더니, 제일 빠른 병원이 11월이고 대구에 좀 더 괜찮은 영남대병원은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대요." 결국 그나마 검사가 빨리 가능한 병원을 택했다.
애초 국내엔 발달장애를 공부한 전문의 수가 적다.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400명에 못 미치고 그마저도 수도권에 몰려 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은 전국에 총 266곳인데, 서울(111곳)과 경기(58곳)·인천(12곳) 소재가 68%를 차지했다. 전남엔 3곳, 경북·세종엔 각각 2곳뿐이다.
상급종합병원의 접근성도 문제다. 본보 설문조사 결과, 전남(65.6%), 세종(59.4%), 경북(59.1%), 충남(59.1%), 충북(55.6%)에서 차량으로 편도 2시간 이상 달려 3차 의료기관을 다니는 응답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애 어릴 땐 강원도 홍천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러 춘천, 원주로 다니고, 진료 보러는 서울 세브란스까지 다녔어요"(강원), "3차 병원 다니는데 거리만 왕복 3시간에 진료, 약 타는 시간까지 5시간 걸려요. 너무 힘들어요"(대구), "농촌은 두세 달에 한 번씩만 병원 가도 장거리라 너무 지쳐요"(경북)라는 호소가 많았다.
전문가도 병원도 적다 보니, 부모는 '정보 부족'에 헤맨다. 특히 영유아 부모일수록 그렇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김지훈 양산부산대 행동발달증진센터장은 "시중에 검증 안 된 치료법이 난무하는데, 부모님이 그 말만 믿고 몇 년 보내다 골든타임을 놓치기도 한다. 대학병원이 발달재활치료의 표준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자폐성 장애는 '만 3~5세 사이에 집중적인 주 20회 치료'가 권고된다. 행동발달증진센터는 자·타해를 보이는 발달장애인의 문제적 행동은 줄이고 사회적 적응을 돕는 전문 의료기관으로, 현재 전국에 딱 10곳 있다.
발달장애인 부모이자, 서울에서 사설 발달센터를 운영 중인 김동옥 대표는 "(자녀 진단 후) 초기에 올바른 정보를 접하지 못한 부모님이 헤매기 시작하면 황금 같은 2, 3년을 센터 간판만 보고 비싼 돈 쓰며 돌아다니게 되기 쉽다. 저는 부모교육에 특히 신경 쓰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경기도에서 6세 자폐 아동을 키우는 부모는 "(치료·양육 관련) 정보를 얻을 기관은 당연히 없고, (사설 센터) 관리도 안 된다"며 "아파트 단지에 있는 '무발화(無發話) 센터' 같은 곳도 인증은 받았는지, 자격증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누가 여기서 말 텄단다' 하면 부모들이 우르르 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의 한 응답자도 "처음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부모는 많이 혼란스럽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아이가 있는 곳에서 누구에게나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고, 충북의 부모도 "정보를 알려주는 곳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홍보도 부족하다"고 했다.
맞춤형 복지 연계와 정보 제공을 위한 발달장애인지원센터가 전국 18곳(중앙·17개 권역)에 설치돼 있지만, 이용률은 아직 낮다. 전문가 상담을 통해 서비스를 안내하고 모니터링도 하는 '개인별 지원계획 서비스'는 지원센터 핵심사업 중 하나인데,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해당 서비스 상담을 받은 1만1,324명 중 실제 계획 수립까지 한 경우는 1,600명 남짓에 불과하다.
초대 중앙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장을 지낸 최복천 전주대 재활학과 교수는 "한국은 주간활동, 활동지원, 바우처 등 각종 서비스가 분절적으로 제공되고 있고,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지원센터는 행정적 권한과 재정 교부 권한이 없어 실질적으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정 기능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발달장애 발견부터 늦다. 복지부 '2021년 발달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 발견(의심) 시기는 평균 7.3세로 자폐성 장애는 3.1세, 지적장애는 7.9세로 나타났다. 장애 진단 평균 연령도 11.8세로, 자폐성 장애는 4.6세, 지적장애는 12.8세였다. 조기 개입의 적기로 꼽히는 3세보다 한참 늦다.
정부는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발달장애를 더 빨리, 확실히 발견하기 위한 개선방안을 연구·검토 중이다. 현재도 생후 9~12개월부터 6세까지 6번 발달선별검사를 하지만, 부모가 직접 문진표를 체크하는 방식인 데다 검사 항목에도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와서다.
그러나 전문가와 병원 부족에 대한 근본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신의진 세브란스 소아정신과 교수는 "영유아 검진 제도를 개선한들, 정작 문제가 있는 아동을 조기 발견할 전문성(인력)과 인프라 자체가 없다"고 꼬집었다. 영유아 검진은 주로 소아과에서 하지만, 사실 소아과는 '신체 발달'이 전문 분야라 사회성·인지 같은 '정신 발달'과 관련한 추가 교육 없이는 충실한 검진이 어렵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소아과·소아정신과 의사, 임상심리사, 교사 등 영유아 정신건강 분야와 관련한 현업 종사자들을 상대로 추가 연수나 국가 차원 아카데미 설립 등 전문가 양성 체계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프라는 없는데 바우처만 일단 뿌리는 실정"이라며 "미국 같은 경우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공적인 필요 인력이라고 보고, 수련 시에 주 정부별로 지원도 많이 해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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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명, 발달장애를 답하다
<1>골든타임을 놓치다
<2>인프라 찾아 떠돈다
<3>밑빠진 독에 돈붓기
<4>인력공급, 양과 질 놓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