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정부 인사와 한국 기업 간 접촉이 최근 잦아지고 있다. 해당 국가에서만이 아닌 이젠 국내 순방 때 한국 기업 방문이 필수 코스가 된 듯하다. 16일 한국을 방문한 중국 공산당 서열 3위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도,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그랬듯 서울 강서구 LG사이언스파크를 들러 LG의 핵심 제품들이 전시된 이노베이션 갤러리를 1시간가량 살폈다. LG는 두 달여 만에 미중 최고 권력자를 잇따라 맞이했다. 우리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 등이 해외 순방 시 보안상 이유로 함부로 해당국 기업 현장을 찾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 모양새다.
기업들은 난감해한다. 외부에 개방하지 않는 생산시설을 공개해달란 요구는 애교에 가깝다. 이젠 대놓고 현지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SK그룹은 7월 최태원 회장이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화상 면담을 진행한 뒤 총 290억 달러(약 41조2,670억 원) 투자를 약속해야 했다. SK뿐만 아니라 국내 4대 그룹이 최근 공식 발표한 대미 투자 규모는 560억 달러(약 79조6,880억 원)를 넘어서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 기업들로부터 받은 거액의 현지 투자 약속을 정책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그간 손대지 않았던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친환경에너지 등에 투자를 받으며 직접 키우려 한다. 자국 산업 육성과 개인 치적 홍보에 우리 기업들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다. 그간 주목받지 않던 아시아 변방국에서 세계적 기업을 보유한 국가로 우리가 성장했다는 방증이어서다. 전 세계가 미래 산업으로 꼽은 산업을 우리가 보유해 주목받는 것일 수도 있고, 기업 입장에선 성장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두려움이 밀려온다. 미국 투자 약속은 결국, 미 현지에 생산시설을 두지 않은 기업은 더 이상 재화를 팔 수 없다는 협박에 떠밀린 결과물이다. 동맹국, 한미자유무역협정 등 기존 약속을 무시하고 철저히 자국만 생각해 정책을 편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우리 주요 수출시장인 유럽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압박을 가할 태세다.
기업들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산업마저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현지시설은 기술유출 위험이 상존하고, 현지 해당 산업 육성의 씨앗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또 해외에 투자를 집중하면 그만큼 수출 물량이 줄어 국내 산업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문제도 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한국에 대한 차별 조항이 담긴 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통과는 시장 경제만 강조하며 입법 동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리 정부가 미 정부와 사전 협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정부는 선진국들이 무리하며 산업 재편에 나선 이유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반세기 만에 진행되는 산업구조 대전환 국면에서 뒤처진다면 또다시 후발주자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미국 등 주요국들이 청사진을 제시하며 기업들을 이끌고 있는 이유다.
우리에게도 정부 역할은 절실하다. 과거 기업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행태가 아닌 미래 산업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정책을 펴야 하고, 낡은 제조업 분야의 혁신도 반드시 이뤄야 한다. 기업 보호막 역할도 해야 한다. 시행착오를 중단하고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길 산업계에선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