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아내와 한 살 된 아기를 남겨 놓고 왔다. 내 인생 전체가 무너졌다.” 지난 26일(현지시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한 한 러시아 남성(32)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나가 살인을 할 순 없었다”며 괴로운 마음을 토로했다. 러시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지난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이 발표되자 황급히 몸만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는 “튀르키예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두 달 후에 만료된다”며 “가족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하다”고 침통해했다.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전쟁 동원령을 피해 러시아에 가진 것을 모두 두고 해외로 도피한 러시아 남성들의 불안한 생활 모습을 보도했다. 지금까지 러시아 인접국인 카자흐스탄과 조지아, 튀르키예 등으로 탈출한 러시아 남성의 숫자는 18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카자흐스탄이 10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조지아(7만 명), 튀르키예(1만 명)순이다.
카자흐스탄 국경 도시 오랄에선 여행 가방을 들고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러시아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WP는 전했다. 카자흐스탄 탐사보도 기자인 루크판 아흐메디야로프는 “갈 곳이 없는 이들은 매일 밤 영화관이나 카페, 사원 같은 곳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며 “말도 거의 하지 않는 이들의 얼굴엔 상실감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고 전했다. 카자흐스탄 자원봉사자들이 그나마 새로 도착하는 러시안 남성들에게 자국에서 사용 가능한 휴대폰 심(SIM) 카드와 음식, 음료수를 제공하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남성들이 해외로 도피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러시아 남성(42)은 “러시아에서 튀르키예로 바로 오는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어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2개 국가를 거쳐 돌아오느라 총 나흘이나 걸렸다”며 "그 과정에서 가지고 있던 돈들도 거의 다 써 버려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튀르키예에 왔지만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해외로 탈출한 대부분의 러시아 남성들이 같은 신세일 것”이라고 말했다.
동원령에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러시아 남성들은 분노도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영화감독으로 일한 한 남성(33)은 “동원령이 발표된 날 어머니가 ‘넌 지금 떠나야만 해’라고 휴대폰 문자를 보내 왔다”며 “러시아에서 그간 쌓아 온 내 사업과 경력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최근 도착한 세르게이(26)는 아예 정착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동원령이 발표된 날 친구한테 돈을 빌려 첫 비행기로 떠났다”며 “기괴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다스리는 러시아로 다신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시차를 두고 밝혀졌지만 전쟁에 나간 러시아 군인들의 삶도 피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 뉴욕타임스(NYT)가 이날 개전 초기 러시아 군인들이 가족·친구와 통화하는 내용을 입수해 보도했는데, 대부분 물자가 부족하다거나 전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통화도 있었다.
한 군인은 “상부에서 우리는 훈련을 할 거라고 했는데 전쟁터로 끌고 왔다”고 불만을 터트렸고, 다른 군인인 알렉산드르는 "푸틴은 바보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를 점령하려 하지만,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며 푸틴 대통령을 비난했다. 또 다른 군인은 물자가 부족해 "우크라이나 가정과 기업을 약탈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었다. 군인인 세르게이는 여자친구와 통화에서 “민간인들을 잡아 옷을 벗기고 숲에서 총으로 쏴 살해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민간인을 왜 포로로 잡아 두지 않았느냐'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그러려면 그들에게 음식을 줘야 하는데, 우리도 부족해"라고 답했다. 세르게이는 수주일 뒤 어머니와의 통화에서는 "본부 주변 숲에 갔다가 민간인 복장의 시신 무더기를 봤다. 생전 이렇게 바다처럼 많은 시신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