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 사이에는 17초 룰이 있다. 한 사람이 상대의 대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17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에 착안하여,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할 때 발언 시간이 17초를 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이다. 17초는 짧으면서도 길다. 가타부타 쓸데없는 지식 자랑을 할 수도, 중언부언 하소연과 신세타령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정말 간단명료하게 용건만 간단히 하면, 딱 17초를 즈음하여 내용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나와 내 친구들의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이 시작된 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성이 아는 체하며 가르치려 드는 태도)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스스로도 뜨끔했지만 특히 많은 중년 남성과의 대화에서 맨스플레인이 이런 거구나 느끼는 순간이 많았다. 어떤 이는 대화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말을 끊고 끼어들며 '나 때'를 소환하곤 했고 개중 많은 말들도 상호 간의 대화라 부르기 민망하리만큼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주식, 부동산, 정력 등 소박한 그들의 자랑거리가 크게 대수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위를 상하게 할 수는 없어서 그저 염소처럼 '하하하하' 짧게 웃어넘기곤 했다. 나름대로 비언어적 거절 의사를 밝힌 셈이었으나 대부분의 아저씨들은 별 불편하거나 민망한 기색 없이 흐뭇해하며 다음 타깃을 물색하곤 했다. 문제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멀지 않아진 요즘 부쩍 그들이 눈에 밟힌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입 대신 지갑을 열라고 하던데, 여전히 지갑은 홀쭉하고 입은 한없이 가벼운 나는, 어떻게 해야 그런 비극을 대물림하지 않고 자연스레 사람들과 섞이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시끌벅적한 학교 수업 시간에도 대부분의 여자 어린이, 청소년은 정답이 아니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의아한 일이다. 성교육 시간에는 틀린 게 없으니 걱정 말고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아무리 다독여 봐도, 또래 남학생들이 짓궂게 장난치며 별 이야기를 다 해도, 대부분의 여학생은 그저 얌전히,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정답만을 말한다. 골고루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발언 기회가 적었던 여학생에게 마이크를 건네줘도 그 학생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그 빈틈을 비집고 남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든다. 교육자는 학생을 달래기 위해서건, 수업을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서건 목소리를 내는 학생에게 한 번이라도 더 관심을 주기 마련이다. 이렇게 발화는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교육자의 관심이라는 자원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다양하게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여전히 여성에게 조신할 것을 강조하는 문화가 여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기 쉬운 여학생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오답이라도 말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성별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말은 곧 권력이다. 누가 가장 많이 말하고 있는가.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크게 들리고 있는가. 우리는 이를 발화권력이라 부른다. 여전히 우리사회의 발화권력은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교육 공간인 학교조차 예외는 아니며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다.
맨스프레딩(Manspreading, 남자와 벌리다의 합성어)이라는 표현이 있다.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다른 이들의 공간을 빼앗고 주변에 불편을 끼치는 남성, 혹은 그러한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다. 쉽게 말해 '쩍벌남'에 대한 일침이다. 그리고 이 쩍벌은 비단 지하철 좌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박정훈 기자의 책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제목처럼, 서비스업을 하며 친절하게 웃었을 뿐인데, 결혼까지 생각하고 고백으로 공격하여 일터를 잃는 여성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모에 대한 이야기부터 연애, 결혼 같은 개인사까지 깜빡이 없이 치고 들어와 불편함을 피력했더니 도리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고 할 때마다, 아재개그를 빙자한 음담패설로 분위기가 박살 낼 때마다, 사라지는 건 늘 여성이었다. 그렇게 공동체는 자주 폐허가 됐다. 나아가 우리는 보고야 말았다. 관심을 빙자한 스토킹으로 사람을 괴롭히다 못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그러고 나서도 가해자에 이입해 2차 가해를 하는 무수히 많은 입을 또 보고야 말았다.
눈치 보고 소통하는 남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눈치를 본다는 건, 우리의 말과 행동, 사고와 태도가 비단 너와 나 단둘 사이에서만 발생하고 그치는 게 아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역사와 맥락 속에서 발생하고 읽힐 수밖에 없음을 감각하자는 이야기다. 말을 했다고 다 소통인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지 그 시의적절함을 고민하며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신조어) 하며 상호교류해야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애당초 잘 못하거나 안 하는 것이면 싹수의 문제겠거니 하는데, 남성들 사이에서는 형님, 아우 하며 기민하게 눈치를 살피니, 그것은 분명 능력보다는 늘 권력의 문제였다.
발화권력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후, 각종 모임에서도 곧 문제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성이라고 꼭 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황한 말로 다른 이들의 발언권을 빼앗다 못해 진행자가 이를 말려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도리어 기분 나빠 하는 이들은 꼭 남자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어떤 이들은 남성의 경제, 정치적인 권력은 인정해도 발화권력은 곧잘 인정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게, 대개 이런 발화권력은 개인이 갖겠다고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생기고 또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자 하지 않아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발화권력을 알고 난 후, 처음에는 당황했고 이내 섭섭하고 조금은 억울했다. 하지만 잠시 시무룩했다가도 또 생각한다. 이 발화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단지 남성 개개인에게 조신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끝내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 '화이트리본 캠페인'은 "남성에 의한 폭력을 멈추려면 남성의 침묵을 깨라"는 구호로 남성의 역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성찰하는 남성보다 어떻게든 아는 것을 뽐내려는 이들이 여전히 더 많은 탓에 가만있기만 해도 조금 더 나아 보이는 착시가 있다. 더 많이 듣되, 그저 침묵하기보다는 사회구조적 차별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살펴보자. '고백으로 혼내준다'는 표현은 누가 많이 쓸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로 너무 많은 폭력을 간과했던 게 아닐까? 도련님과 처남, 친가, 외가 등 결혼 이후 쓰이는 호칭 역시 어떤 발화에 권력을 부여하고 있지 않나?
일상적이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성차별적인 문화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다. 질문으로 먼지처럼 쌓인 차별을 닦아내자. 그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면, 말의 방향만이라도 조금 바꿔보자. 남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맨스플레인은 더 많이 필요하다. 여자 어린이를 괴롭히는 남자 어린이를 옹호하며,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왜 거절하지 못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왜 제대로 동의를 구하지 않았는지, 왜 상대의 경계와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는 자주 17초를 센다. 스스로에게, 또 다른 남성에게. 이 과정을 통해 겹겹이 쌓인 권력이 조금은 무색해지는 순간이 올 수 있기를 꿈꾼다. 그럼 나도 조금 더 가볍게 수다스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우리에게 함께 행복한 수다의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